김해시보

김해시보 제 910 호 18페이지기사 입력 2020년 02월 11일 (Tue) 10:58

제225회 김해시의회 임시회 제1차 본회의 5분 자유발언(류명열 의원)

겨레의 상록수 강성갑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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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5회 김해시의회 임시회 제1차 본회의 5분 자유발언(2020. 02. 05.)



겨레의 상록수 강성갑 선생



김해시의원 류명열



존경하는 56만 김해시민 여러분,

김형수 의장님과 동료의원 여러분,

그리고 허성곤 시장님과 관계공무원 여러분 반갑습니다.

진영읍, 한림면을 지역구로 하고 있는 류명열 의원입니다.



본 의원은 겨레의 상록수라 일컫는 한얼학교 설립자 강성갑 선생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1.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그 시대에는 진영을 비롯하여 인근에 중학교가 없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돈 많은 집안의 자녀들은 마산이나 부산으로 중학교를 다녔으나 대개의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은 배움의 길이 막혀 노동일을 하거나 농사를 지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신 강성갑 선생은 진영에 오셔서 1946년 진영대흥초등학교에 가교사를 빌려서 <진영복음중등공민학교>를 설립하여 진영에 최초로 중학교를 세우신 분입니다.



강성갑 선생은 의령인으로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동지사 대학을 졸업하신 최고의 엘리트로써 열악한 한국의 농촌현실에서 못 먹고 못배우는 젊은이들이 안타까워 부산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학생들에게 돈 한 푼 받지 않고 온 몸과 정열을 다 바쳐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중학교를 설립하여 문을 열자 너도 나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해 10월부터는 현 진영여자중학교 자리에 일본인 주택과 창고를 매입하여 2부제 수업을 실시하였고 진례와 녹산에 한얼학교 분교를 설립하여 지금의 진례중학교와 녹산중학교의 모태가 되게 하였습니다.

 

2. 강성갑 선생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진영을 비롯하여 인근 대산, 수산, 한림, 진례, 장유 등지의 재래시장을 찾아 다니며 밧데리 확성기를 지게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배워야 산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외치고 다녔으며 1인1기 기술을 익히게 하며 배우면서 기술을 익혀 학생들 스스로 학비를 벌게 하였으며 학생들과 함께 직접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학교를 지었고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에는 혼자서 밤늦게 까지 흙벽돌을 만들었습니다.



강성갑 선생의 명성을 전해들은 서울의 대학생들이 방학이 되면 봉사단체를 조직하여 한얼중학교에 와서 낮에는 함께 흙벽돌을 만들고 밤에는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학생들과 함께 지냈다고 합니다.



당시 봉사단체 학생들은 대학에서 배우는 것 보다 한얼중학교에 와서 일하면서 배우는 것이 더 알찬 교육이라고 소감발표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봉사단 중에 연세대학교 교수인 김동길 박사, 전 문교부 장관을 지낸 이규호 박사, 나운영 음악가 등이 한얼학교에서 봉사 활동을 했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박애주의자로써 인류는 모두 평등하고 인종, 종교, 계급을 초월하여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흙을 사랑 하라는 삼애 정신과 희생, 근로, 봉사 정신을 교육의 방침으로 정했습니다.



3. 강성갑 선생은 그 당시 교장 월급이나 교사, 급사, 노동자 월급을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주었다고 합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고 높고 낮음이 있을 수 없다며 노동의 가치는 똑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강성갑 선생의 철학이었습니다.



당시 진영읍 기관장 회의에서 진영읍 도로에 심을 가로수 나무를 선정할 때 감나무를 심자고 강력하게 주장을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감나무를 심으면 “감이 익기도 전에 다 따먹을 것이 아니냐”고 했을때 강성갑 선생은 “먹어도 배고픈 내 민족이 먹지 않느냐”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강성갑 선생은 민족주의자이며 교육의 선각자로써 교육의 궁극적 목적을 구국구민에 두고 이를 위한 첩경으로 과학교육과 기술교육을 통해 창의력을 가진 인재를 양성하려고 하였습니다.



6.25때 미국의 교육 시찰단이 한국에 와서 강성갑 선생의 1인1기 기술교육 현장을 체험하고는 “미국의 교육정책보다 앞선다”고 본국 정부에 보고 하였다는 기록이 미문화원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강성갑 선생은 이 땅에 중학교, 고등학교를 세우시고 대학까지 세우기 위해 부지까지 마련해 놓았으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공산주의자란 누명을 쓴 채 그가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던 동족의 총을 맞고 낙동강 수산교에서 38세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만일 강성갑 선생이 돌아가시지 아니하고 그 꿈을 이루었다면 진영은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교육도시가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강성갑 선생은 연세대학교 유명인사 5인에 선발되셨고 그가 돌아가신후 1954년 5월 14일 경남도에서 지원사업으로 그의 동상을 만들어 제막하는 날, 진영읍민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소복차림으로 몰려들어 통곡을 하였고, 함태영 부통령께서 직접 오셔서 추도사를 하시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 분이 가신지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겨레의 상록수처럼 살아오신 강성갑 선생에 대한 교육적 이념과 철학을 우리 교육현장에 뿌리 내릴 수 있도록 우리시가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야 된다고 사료됩니다.



그 분이 남긴 소중한 교육적 가치는 우리시의 크나큰 자산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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