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가야와 광개토대왕 발표 내용

고구려군 침입 이후의 금관가야

소속 :
자하현립대학
발표자 :
田中俊明
작성일
2003-04-15
본고에서 高句麗 進出이라고 하는 것은, 高句麗가 400年에 [任那加羅] 즉 金官國을 侵攻한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 侵攻에 의해 큰 衝擊을 받은 加耶社會에는 큰 變革이 찾아왔다고 이해되고 있다. 여기서는 金官國에 있어서의 社會的·政治的變革에 대해서 考察하고자 한다.

일본열도 초기의 기마문화

소속 :
가시하라연구소
발표자 :
千賀久
작성일
2003-04-15
일본의 말문화·馬具에 대한 연구사에서 江上波夫씨가 제창한「기마민족정복왕조설」은 중요한 획기였다(石田·江上·岡·八幡 1949, 江上 1965). 일본의 고분시대 전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동북아시아계 기마민족이 한반도 남부의 加羅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정복왕조를 수립했다는 일본 고대국가의 성립에 관한 가설이다.

호태왕비와 고구려 왕권

소속 :
중국사회과학원
발표자 :
徐建新
작성일
2003-04-15
4∼5세기의 동북아지역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고구려의 호태왕비는 중요한 사료이다. 고구려와 조선고대사에 관한 고고학적 자료가 날이 감에 따라 증가하고 있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호태왕비는 여전히 대체할 수 없는 연구가치가 있다. 1880년에 비석이 발견된 이래, 지금까지 비석에 관한 많은 연구성과를 축적하게 되었는데, 대체로 두 개의 부류로 나눌 수 있겠다. 즉 비석조사·탁본연구·해독연구 등 금석학 시각에서 진행한 사료연구와 역사학 시각에서 출발한 비문내용연구(즉 碑文이 반영하고 있는 역사사실에 관한 연구)이다.

한식불교가사에 대한 관견

소속 :
북경대학
발표자 :
馬世長
작성일
2003-04-15
본문 제목중의 세 가지 단어에 대해 먼저 그 정의와 설명을 하기로 하겠다.

1. 가사(袈裟)
소위말해 가사(袈裟)란 불교승려들, 즉 부처와 그 제자들이 착용한 세가지 옷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의복과 이름이 중국본토에서는 본래 없었다. 불교가 동쪽으로 전래되고 불경(佛經)이 중국말로 번역되면서 한문불적(漢文佛籍)과 한문기록(漢文記錄)등에 의복의 이름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광개토왕릉비문과 가야

소속 :
함안군청
발표자 :
백승옥
작성일
2003-04-15
최근 가야사 연구성과는 괄목할 만 하다. 이는 약간의 정책적 뒷받침과 더불어 연구자들이 분발한 결과로 이룩된 것이지만 자료의 증가가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자료의 증가란 옛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고고학적 자료, 즉 유적과 유물의 증가를 말함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고고 자료는 문화 양상을 보여 줄 뿐 구체적 정치 정황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연구결과물의 수적인 증가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가야사가 안고 있는 제반 문제점들이 해결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가라연맹과 고구려

소속 :
한국전통문화학교
발표자 :
이도학
작성일
2003-04-15
가야사는 연구 업적이 꾸준히 蘊蓄된 관계로 근자에 이르러 괄목할만한 성과를 기록하였다. 특히 가야사에 있어서 중요한 시점은 4세기 후반과 5세기 전반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가야 지역을 둘러싼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倭 등의 국제적인 이해 관계가 첨예하게 맞물리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고고학에서 본 4~5세기대 고구려와 가야의 성장

소속 :
동국대학교
발표자 :
강현숙
작성일
2003-04-15
한반도의 4. 5세기대는 변혁의 시기라 할 수 있다. 高塚의 축조와 고총에 부장된 多種 多量의 부장품들, 특히 무기, 철제 갑주와 마구, 金工裝身具 등과 殉葬은 왕권국가로서 三國의 面貌를 잘 대변하여준다. 가야 지역도 예외는 아니다. 가야 지역에서는 4세기대부터 壯大한 무덤에 다량의 토기와 갑주, 마구를 비롯한 외래 문물들이 부장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김해 대성동이나 부산 복천동 유적에서는 대형의 主副槨式 무덤의 축조과 함께 순장도 확인되나, 專制王權의 外表로서 고총에 비견될 만하나 거대 분구를 형성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5세기대 고총과 차이를 보인다.

고구려군의 남정과 가야

소속 :
부산대학교
발표자 :
김두철
작성일
2003-04-15
更子年(400년) 高句麗軍의 南征은 영남지역사회에 사회·문화·정치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에 대하여 의심을 둘 여지는 없다고 본다. 당시의 광개토왕이 이끌던 고구려군은 선진의 무장을 구비하고 기동성을 발휘하여 중국에까지 위협적인 존재로 대두해 있었다. 이 사실은 집안의 광개토왕 비문이 잘 전해주고 있다. 그러한 고구려군이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영남지역에서 펼쳤던 활약상은 아직 民의 통제에 있어서 지역적 수준을 벗어날 수 없었던 당시의 영남 제 세력에게는 커다란 충격 그 자체였다고 믿어진다(金斗喆199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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