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가야,왜와북방 발표 내용

아차산 4보루출토 고구려 갑주와 마구에 대하여

소속 :
고려대학교
발표자 :
최종택
작성일
2004-04-26
지하듯 고구려 고고학 연구는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으며, 이는 대체로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한 자료에의 접근상의 한계에 기인한 것이다. 고구려의 주요 활동무대였던 중국의 동북지방과 북한지역은 아직도 접근이 용이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동안의 고구려 고고학 연구는 보고서에 게재된 2차 자료를 대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중국과 북한의 고고학 연구 수준이 낮은 탓에 보고서에 게재된 자료는 양적이나 질적인 면에서 부실한 것 또한 사실이며, 이 역시 고구려 고고학 연구에 있어서 커다란 제약으로 작용하였다

한반도 남부지방고분에서 보이는 일본고분의 축조요소

소속 :
계명대학교
발표자 :
조영현
작성일
2004-04-26
고분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외부구조와 내부구조로 구분된다. 그 구분의 기준은 피장자를 안치할 공간시설과 그것의 축조와 유지의 기능과 직접 관계가 있는 범위로 한정하며, 그 밖의 구조는 모두 외부구조로 보고자 한다.
고분 구조의 여러 요소 중에는 축조방식과 함께 도입처의 고분기술자가 직접 또는 지휘하여 축조한 것으로 보이는 예도 보이지만 대체로 파급지의 고분은 도입처 고분의 모델을 답습하거나 현지변모형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부분적인 채용 및 생략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고구려의 속민에 대한 연구

소속 :
경북대학교
발표자 :
김현숙
작성일
2004-04-26
광개토왕 사후 2년 뒤인 414년에 그 아들인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왕비에는 ‘屬民’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 비문에서 ‘속민’으로 표현된 존재는 백제와 신라, 그리고 동부여이다. 여기서 속민은 ‘예속되어 있는 민’, 또는 ‘속국의 민’이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백제, 신라, 동부여 등은 민이 아니라 국가체를 지칭하는 명칭이므로 엄밀히 말하면 속국이나 附庸이란 표현이 더 알맞을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에서는 4세기말 5세기 초에 백제와 신라, 동부여를 자국의 ‘속민’이라고 표현했다.

진식대구의 남과 북

소속 :
한신대
발표자 :
권오영
작성일
2004-04-26
冠, 耳飾, 帶具, 飾履 등의 귀금속 장신구는 지배층이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과시하는 상징물인 동시에 각지, 혹은 각국 간에 이루어진 정치외교적 관계의 표상이기도 하다. 토기나 철기의 유통과는 또 다른 중요한 정치외교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셈이다. 이런 까닭에 동아시아 각국의 국제관계 연구에서 장신구는 裝飾大刀, 중국제 도자기와 함께 많은 관심을 끌어 온 소재이다.

삼국지 동이전의 역사적 가치 및 그 내용

소속 :
吉林大
발표자 :
위존성
작성일
2004-04-26
가야(加耶)는 6世紀 이전 한국 동남부에 존재했던 정권으로 가야(伽倻), 가나(迦羅), 가락(駕洛)등으로도 불렸다. 가야(加耶)는 변한(弁韓)에서 왔다. 역사적으로 변한(弁韓), 진한(辰韓), 마한(馬韓)은 삼한(三韓)으로 통칭되었으며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은 가야(加耶)와 공존한 신라(新羅), 백제(百濟)로 발전되었다. 삼한(三韓)에 관한 비교적 구체적인 기록은 중국 고문헌인 『三國志ㆍ東夷傳』에서 가장 먼저 보인다. 그러므로 삼한(三韓)과 가야(加耶), 신라(新羅), 백제(百濟)의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 『三國志ㆍ東夷傳』에서부터 연구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왜 출토의 마구로 본 국제환경

소속 :
福岡大
발표자 :
모모사키
작성일
2004-04-26
4세기전반의 중국은 西晉이 와해되고 북방민족이 남하 · 할거하여 오호 16국시대가 되었다. 중장기마전술에 의한 무인정권의 성립은 갑주에 관식 · 장신구 · 대금구를 갖추고, 금속장식 재갈 · 안장 · 등자를 착장한 말에 올라타 철모 · 활과 화살 · 도검을 지닌 騎甲裝具의 확립을 촉진시켰고, 그것은 軍事標章의 계층적 편성에 의한 鹵簿制로 발전하였다. 漢 문명으로부터 자립하고자 했던 동아시아의 여러 민족은 자신의 기마문화에 魏晉時代의 군사 · 공예기술을 복합하여 민족색이 풍부한 武冠制를 창조하였다.

神功皇后論

소속 :
東京朝鮮大
발표자 :
고관민
작성일
2004-04-26
『古事記(712년)』·『日本書紀(720년)』에 의하면 제14대 仲哀의 황후였던 神功은 新羅를 치고 그곳을 “천황의 말을 사육하는 자;御馬甘”로 삼고, 나아가 加耶七國을 평정하고, 百濟도 “바다 건너편의 직할지;渡의 屯倉”로 삼았다는 영웅으로 묘사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架空된 이야기이며, 日本 내에서도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1945년 이후에는 부정되어왔다. 그러나 역대의 문헌 및 祭禮에 그 흔적이 광범위하게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이러한 이야기가 왜 『古事記』·『日本書紀』에 대규모로 서술되어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졌지만, 『古事記』·『日本書紀』의 성격에 관한 해명이 충분히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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