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의 쇠퇴와 멸망] 가락국의 쇠퇴

작성일
2018-08-28 17:55:06
담당부서 :
가야사복원과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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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은 칠포국(柒浦國, 칠원)·고사포국(古史浦國, 고성)·사물국(史勿國, 사천) 등 포상팔국(浦上八國)의 도전을 받게 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전까지 가락국이 가지고 있었던 해상교역권에 도전했던 포상팔국의 침입을 독자적으로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 신라에 왕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고, 6천 여 가락국 인민이 포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전쟁을 계기로 이전의 해상교역권은 위축되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313∼314년에 고구려가 낙랑·대방군을 축출하면서 가락국의 선진문물 공급원이 차단됩니다. 이제 낙랑·대방군과 일본열도 사이의 중개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은 상상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후 가야사의 중심이 북부로 이동하게 되었던 것도 이것과 관련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삼국유사』가락국기의 표현대로 가야시대의 김해는 여뀌 잎같이 좁아서 농업으로 부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이 시기가 되면 신라는 울주의 달천광산을 개발하게 되고 가락국의 철생산을 능가하게 됩니다. 가락국은 더 이상 철의 왕국일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가락국의 쇠퇴를 단 한번의 광개토왕의 남정(南征)에서 구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선진문물 공급의 차단과 철생산 능력의 역전과 같은 변화에서 찾아져야 할 것입니다. 「중원고구려비」(448년)의 토내당주(土內幢主)의 기술과 같이, 광개토왕의 남정 이후 고구려는 신라 영토 내에 군대를 주둔시키게 되었고, 고구려를 등에 업은 신라는 울산을 통하여 장산국(獐山國, 장산 일대)·거칠산국(居柒山國, 황령산 서북∼동래)과 같은 가야계 소국을 병합하고 동래방면으로 진출합니다. 5세기 전반∼중엽이 되면 동래 복천동고분군에서 신라색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 같이, 낙동강 이동지역은 이미 신라의 영향력 하에 편입됩니다. 가락국은 낙동강을 경계로 고구려를 업은 신라와 대치하게 되면서 동요하게 되었고, 더 이상 가야사의 중심일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고령·합천·함안·창녕지역 등과 달리, 김해지역에 마운드가 높은 무덤-고총(高塚)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4세기말부터 만들어지는 고총은 김해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미 가락국 왕권이 고총고분의 축조능력을 가지지 못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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