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회의 가락인] 김유신(金庾信)

작성일
2018-08-28 17:5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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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복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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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은 제29대 무열왕과 함께 신라의 삼한통일을 이룩한 기둥이었습니다. 개황(開皇)15년(595)에 진천에서 태어나 15세에 화랑이 되었고, 17세에 혼자 석굴에 들어가 무예를 수련하였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를 상대로 수많은 전쟁에서 전공을 세우면서 642년에 압량주(양산)군주, 644년에 소판(3품)을 거쳐, 647년에 김춘추와 함께 선덕여왕을 도와 여왕의 통치불가를 주장하는 귀족 비담의 난을 진압하여 648년에 이찬(2품)에 오르고, 654년에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즉위하면서 명실공히 신라 최고의 지위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660년에 백제를 치고, 668년에 고구려를 통합하여 태대각간(太大角干)이란 최고위에 오른 뒤 당군(唐軍)의 축출과 삼한통일의 완성을 눈앞에 둔 673년에 세상을 떠납니다. 김유신이 신라 조정의 최고의 위치까지 오르게 된 것은 통일전쟁에서 세운 혁혁한 무공이 첫번째 요인이었지만, 누이동생 문희(문명왕후)를 무열왕에게 출가시켜 신라왕실과 혼인을 맺었던 것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김유신비」에는 '헌원(軒轅)의 후손이며 소호(少昊)의 후예이라 하였으니, 남가야의 시조 수로는 신라와 같은 성(姓)이 된다'고 하여, 신라인들이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이기 때문에 성을 김(金)으로 했다는 것에 영합하는 출신전승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던 것 같습니다. 신라와 동일한 출신을 주장함으로써, 신 김씨(新 金氏)의 김유신 일족은 구 김씨(舊 金氏)로 표현되는 전통적 골품제도의 벽을 넘으려 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후 100여 년 이상 김유신의 후손들이 전통 경주귀족들이 시기할 정도의 영화를 누리게 되었던 것도 이러한 노력의 결과였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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