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김해] 김해성 전투와 사충신(四忠臣)

작성일
2018-08-29 10: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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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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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8일 다대포를 건너 왜병이 죽도에 진출하자 김해부사 서예원(徐禮元)은 초계군수 이유검(李惟儉)의 지원을 얻어 날랜 군사를 초선(哨船)에 실어 정탐케 하였으나 적에게 잡혀 실패합니다. 4월 19일 새벽부터 김해성이 포위되자 조총세례에도 불구하고 결사적인 항전을 시작하였습니다. 인망과 재덕을 겸비한 송빈(宋賓, 1542∼1592, 진영)이 이대형(李大亨, 1543∼1592, 활천)과 장정 백 여 명을 이끌고 입성하였고, 무과급제자인 김득기(金得器, 1549∼1592, 외동)는 동문을 지켰고, 수사(水使) 류용의 손자 류식(柳湜, 1552∼1592, 예안리 마산)이 가동 수 십 명을 이끌고 입성하자 사기가 높았습니다. 김해성은 성벽이 높고 참호가 깊어 왜군이 성에 접근하기 어려웠고 동문을 지키던 사관 백응량(白應良)은 성 위 소나무에서 활을 쏘아 적의 부장까지 사살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상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은 창원 병영에 많은 군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병을 보내지 않았고, 19일 밤에 왜군이 왜병의 허수아비를 성안에 던져 넣자 성내가 소란해집니다. 더구나 초계군수 이유검이 달아나고, 김해부사 서예원이 배로 진주로 도망하자, 수세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빈·이대형·김득기·류식의 네 사람은 20일에 성이 함락할 때까지 싸워 장렬하게 순국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역사상 최초의 의병이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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