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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눌 노상익.

작성일
2018-10-05 13:30:25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
2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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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눌 노상익

대눌 노상익

대눌(大訥) 노상익(盧相益)(1849-1941)

대눌(大訥) 노상익(盧相益)(1849-1941)은 성재 허전의 제자로
동생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과 더불어 당시 영남학파를 주도했다.
한말 홍문관 시강(侍講)의 벼슬을 하며 쇠퇴하는 국운을 바로잡으려 노력하다가,
을사늑약 후에는 만주에서 유민들을 돌보고 독립군들과 소통하며 일제에 항거한 절개 높은 선비이다.

대눌 노상익은 1849년 김해시 한림면 금곡리에서 극재공 노필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동생 소눌 노상직과 당시 김해부사였던 성재 허전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는데, 1876년 조정에서 김기수 등을 일본 수신사로 파견한다는 소식을 듣고 대눌은 "천년토록 부끄러운 병자년의 이야기(千載羞言丙子年) 서쪽 먼지 씻기도 전에 또 동쪽이라니(西塵未洗又東邊)"라는 내용의 시를 지어 일본과 수교하는 것을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했던 부끄러운 일에 비유했다.

34세(1882년 고종 19년)에 문과 별시 을과에 제일인(第一人)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를 제수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1884년 성균관 전적과 사헌부지평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1892년에 사헌부 장령과 전적의 직책을 맡았다. 대눌은 쇠퇴해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했다. 이는 1885년 세자에게 올린 '부주선조경계십잠소(敷奏先朝警戒十箴訴) '라는 글에도 나타난다. “무릇 우리나라 지금의 형세는 편안합니까. 위태합니까. 다스려지고 있습니까. 어지럽습니까.(중략) 실로 난리가 어디서 나올 지 알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백성들은 곤궁하고 재정은 바닥나서 근심 걱정이 한 둘이 아닌데 축적해둔 곡식은 없고 창고는 텅 비었으며 도적들이 일어나서 동네마다 소란스러운데 수령들은 탐학하여 백성들은 불안하고 뇌물이 공공연히 자행되어 관리들도 마구 뒤섞여 있습니다. 그 근심이 큰일이 아닙니까.”

1905년에는 홍문관(조선시대에 궁중의 경서 사적관리, 문환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시강(왕이나 동궁 앞에서 글을 강의하는 벼슬)을 지냈으나 을사보호조약을 반대하는 뜻으로 물러났다. 대눌은 홍문관의 경연이 유야무야 되는 것을 보고 홍문관의 경연을 폐지하지 말 것을 상소했고, 을사늑약에 대한 울분을 담은 ‘시일야방성대곡’을 신문에 실은 위암 장지연에게 울분과 격려가 담긴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대는 1년 3백 60여일을 거리낌 없이 말하지 않은 날이 없다.(중략) 조정이 규범을 따르지 않는 일이 있으면 기사화하고, 백성의 뜻을 짓밟으면 또 기사화한다.”

1906년 2월 조선 식민지화의 원흉 이등박문이 부산에 오면서 일제는 대눌을 일본 항거의 요주의 인물로 지목했고, 그 때문에 대눌은 일본 밀양헌병대에 의해 영남루에 구금되기도 했다. 1907년에는 이준이 헤이그에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다가 순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동방의 오백년 강상이 맺혀/이군 창자 속의 피가 되었나니/철철 흘러내린 헤이그의 물은/만국에 다 뿌려도 마르지 않으리/우리 동포 함께 모두 이 피로 맹세하여/나라 원수 갚는걸 그대 혼백 보게 하세"라는 시를 지어 이준 열사의 순국을 기리면서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냈다.

1910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치욕적인 한일 합병조약이 맺어진 해, 일본 천황이 대눌을 포함한 조선의 주요 인물들에게 은사금을 하사하려 했다. 밀양 헌병대 소장 여송치가 대눌을 찾아와서 “그대는 많은 사람의 사표가 되는 인물이므로, 천황께서 은총을 베풀어서 은사금을 내리는 것이다.”라고 했으나, 대눌은 “이는 매국노들이나 받는 것이지 망국의 대부가 어찌 이에 관여할 것인가! 만약에 또다시 받으라고 강요하면 죽을 뿐이다.”라며, 그것을 단호히 거절하고 끝까지 받지 않았다.

대눌은 경술국치 이듬해인 63세 때 원수와 한 하늘밑에서 살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로 만주로 건너갔다. 성균관대 이희목 교수는 논문 <대눌 노상익의 망명생활과 유민 시> (한문학보 2008)에 대눌이 망명길에서 지은 한시 몇 편을 밝혔는데, 그 중에 임금이 욕을 당하고 나라가 망했음에도 고신으로서 죽지 않고 밥 먹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는 구절이 있다. 압록강 건너 만주 땅을 눈앞에 두고 지은 <도강록>에 실린 시편에는 나라를 잃고 고향을 떠나는 대눌의 시름과 고뇌가 스며들어 있다. “앞길이 망망한 이 밤에/ 압록강 한번 건너면 바로/가족과 헤어지고 나라 떠난 고신의 눈물/ 등불 깊어가는 꿈속에서도 울음을 거두지 못 하네.”
“예순 셋에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자니 /변경의 눈보라가 머릿속까지 파고드는 듯/우리나라와 중국 모두가 임금이 없으니/방울진 눈물로 압록강도 목메어 흐르지 않는 듯“

그렇게 압록강을 건너 망명한 대눌은 만주 서간도 지역 안동현 근처에서 유민들과 함께 했다. 양반에서 내려와 백성 속으로 들어가 우리 민족의 전통인 향약을 토대로 공동체적 삶을 이루며 살았고, 그들의 대변자로서 학문을 가르치며 인재를 양성했다. 또한 대눌은 동생인 소눌 노상직과 안효재, 박은식, 이건승, 예대희, 김정기, 안종달 등의 독립군들과 소통하면서, 그들과 함께 일제의 핍박에 항거하며 독립운동을 했다. 망명생활 중에 나라를 걱정하며 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려 한 대눌의 노력은 그가 남긴 저서 <통사절묘>와 <견문쇄록> <서구 결사록> <문집 5권>등에 담겨 전해지고 있다. 대눌의 지조와 정신은 영남지역의 선비들과 후학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만주에서 일본의 끊임없는 감시와 핍박을 받으며 10년을 지낸 대눌은 74세 때, “내 나이 이미 팔순에 가까운데, 여기에서 원수인 일본 관헌에게 모욕을 당할 바에야 차라리 선산 아래에 뼈를 묻겠다.”라며 고향인 김해로 돌아왔다. 대눌은 금곡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에 천산재를 짓고,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천산재로 오는 길에 도랑을 깊이 팠다. 죽을 때까지 18년 동안 두문불출하였고, 1941년 향년 93세로 세상을 떠났다.

천산재 터 뒤편에 대눌의 묘역이 있었는데 대눌의 묘역은 증손자인 노균현이 형제들과 함께 지금까지 꾸준히 관리해 오다가, 2017년 대눌이 독립유공을 인정받아 독립유공 표창을 받게 되면서 대눌의 산소는 2019년 5월 22일 서울 동작구에 있는 현충원에 이장되었다. 대눌이 태어난 금곡리에는 대눌이 망국의 한을 품은 채 말년을 보낸 천산재의 흔적이 남아있고, 묘역이 있었던 선산이 있다. 광주 노씨의 400년 본거지인 금곡 마을의 입구에는 대눌의 집안인 광주 노씨 문중이 1600년대에 입촌을 기념하기 위해 심은 회화나무, 상수리나무, 팽나무, 느티나무, 굴참나무 등의 수많은 오래된 나무들이 세월의 흐름에도 여전히 서 있다.

대눌 노상익과 소눌 노상직의 생애와 독립에 대한 공적에 관한 내용인 다큐멘터리 <서간도의 망명자들>이 2016년 광복절특집으로 2016년 8월 13일 저녁 8시15분-9시에 KBS에서 방영되었다. 2019년 6월 8일에는 김해시 주최,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한문학연구소 주관으로 국립김해박물관에서 김해 출신 독립유공자 <대눌 노상익, 소눌 노상직 형제의 삶과 사상 학술대회>가 열려 성균관대 이희목 교수, 동아시아한문학 연구소 이은영 연구원, 부산대 정석태 교수, 경북대 이필규 교수가 발표하고 수백명이 참석하여 형제의 뜻을 기렸다.

대눌 노상익의 독립유공 표창(2017년 8월 15일)과 국가 유공 증서(2018년 6월 28일)는 대눌의 증손자인 노균현에게 서훈되었다.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
국가유공자증서 국가유공자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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