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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현.

작성일
2018-10-05 13: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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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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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현

금수현

음악의 신이여 영원히 몸바칠 수 있게 하소서!
가곡 '그네' 작곡한 한국 양악계의 디딤돌 금수현

낙동강제방둑 위에 세워진 금수현 노래비
낙동강제방둑 위에 세워진 금수현 노래비 '그네'. 아들 금누리 씨가 설계 디자인했다.
김병찬 기자 kbc@gimhaenews.co.kr

김해군 대저면 사덕마을서 태어나
대저보통학교 때 음악스승 만나 일본 동양음악학교에서 공부

다섯줄의 선 위에서 높은음자리표로 시작되는 악보. 노래를 하거나 연주를 하기 위한 기본적인 기호들이 기록된 것이다. '다섯줄'이나 '높은음자리표'라는 우리말이 없으면, 'staff'와 'G clef'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너무 편안하게 사용하고 있는 '높은 음자리표'라는 말을 생각해 낸 사람이 작곡가 금수현 선생(1919. 7. 22 ~ 1992. 8. 31)이다. 하늘로 날아갈 듯 그네를 타는 아리따운 처녀를 연상시키는 가곡 '그네'를 작곡한 선생은 김해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음악교육·음악행정·한글전용운동·음악보급운동·잡지발행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한 한국양악계의 디딤돌이었다.

"봄은 해마다 찾아온다. 추운 겨울 뒤라도 3월이 되면 봄은 찾아온다. 특히 낙동강변의 봄은 아지랑이가 강변 모래위에 아른거리면서 시작된다." 봄기운을 전해주는 이 문장은 금수현 선생이 자서전 '금수현 나의 시대 70'(월간음악출판부·1989)에 쓴 것이다.

금수현 선생이 창간한 '월간음악' 창간호 표지와 선생이 엮은 '고등학교 음악교과서' 표지

금수현 선생이 창간한 '월간음악' 창간호 표지와 선생이 엮은 '고등학교 음악교과서' 표지
사진 제공=김해문화의전당

금수현 선생은 봄 아지랑이가 아름다운 낙동강변의 김해군 대저면 사덕마을 2650번지에서 정미업과 땅콩재배를 했던 김득천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저'는 낙동강 어귀에 있는 큰 섬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대저는 1978년에 부산시 북구 소속으로 편입되었다가, 1983년에 강서구 관할이 되었다.

대저보통학교 4학년 때 선생은 음악의 길을 열어주는 스승 한 분을 만났다. 진주사범을 나와 부임해 온 김두성 선생은 음악이론에 조예가 깊고 오르간도 잘 타서 어린 수현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선생은 부친의 뜻에 따라 부산 제2상업학교(부산상고, 현 개성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교가를 배우던 음악시간에 선생이 잘못된 악보를 지적하여 학교에서 시정하는 일이 있었다. 선생은 상업학교를 다니면서도 음악공부를 계속했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할 것을 기대하던 부친을 설득하여 일본 유학의 길을 떠났다. 동양음악학교 본과에 성악전공(바리톤)으로 응시했는데, 9명의 응시자 가운데 한국인으로는 선생이 유일한 합격자였다. 우유와 신문배달, 피아노 가정교사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학을 하던 중 선생은 일본경찰에 검거된다. 일본으로 가기 전 고향친구들과 조선의 농촌실태를 이야기하며 조선 사람에게 어떤 희망이 있는지 문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등에 관해 대화를 나눈 것과, 금융조합 기관지에 농민해방을 그린 단편소설을 발표한 일이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문화운동 사상범으로 3개월 여 옥살이를 하던 어느 날, 감방 창문 넘어 쇼팽의 피아노곡 '군대 폴로네즈'가 들려왔다. 그 음악을 듣는 순간 폴란드의 독립군이 진격하는 모습이 떠올라 선생은 눈물을 흘렸다. 음악을 무엇보다 사랑했던 선생은 이 순간 "아! 내가 다행히 풀려난다면 저런 곡을 써야지. 굳세게 영원히 음악에 몸 바쳐야지. 음악의 신이여, 내게 그런 기회를 다시 한 번 주소서"라고 기도했다.

귀국 후 독창회·계몽연극 등 활동 소설가 장모와 함께 '그네' 만들어
음악용어 정리·월간음악 발행 음악교과서 등 음악교육사 큰 업적

1940년 음악학교를 졸업한 후에 아사쿠사의 국제극장 내 마츠다케 오페라부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던 선생은 1941년 5월 조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한 후 부산좌(현 부산극장)에서 독창회를 열었고, 친구들과 노래극을 만들어 마산·삼천포·통영 등지를 순회했다. 고향 사덕마을 회관에서 여성들을 모아놓고 계몽강습도 하고, '강팔십'이라는 희극 형식의 농촌계몽연극을 만들어 공연했다. 이 연극은 많은 인기를 끌어 김해읍내 공연도 했다.

동래여고 교사 시절 학생들과 노래극 연습을 하던 모습

동래여고 교사 시절 학생들과 노래극 연습을 하던 모습
사진 제공=김해문화의전당

선생은 1942년 4월 동래고등여학교(현 동래여고) 음악교사가 되면서 음악교육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무렵 소설가 김말봉(金末峰 1901~1961)의 딸 전혜금을 만나 1943년 10월 27일 결혼했다. 소설가 장모와 작곡가 사위의 이 인연이 아름다운 한국의 가곡 '그네'를 만들게 했다. "사위가 쓴 곡을 많은 사람들이 부르는데, 나도 그런 노래를 하나 남기고 싶다"는 장모에게 사위는 "시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사위는 장모가 외는 시를 받아 적었다. 원래는 3장인데, 가운데 장이 생각나지 않는다며 외었던 시가 그대로 노랫말이 되었다.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가 구름 속에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 양 나래 쉬고 보더라. 한 번 구르니 나무 끝에 아련하고, 두 번을 거듭 차니 사바가 발아래라, 마음의 일만 근심은 바람이 실어가네."

그네 뛰는 광경이 눈앞에 떠오르는 느낌을 받은 선생은 그 자리에서 가락을 오선지에 옮기고 아르페지오(분산 화음=화음을 이루는 각 음들을 한꺼번에 소리 내지 않고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또는 오르내리는 꼴로 내도록 한 화음) 풍으로 전주와 반주를 적었다. 가락을 적고 나서 피아노반주까지 적는데 15분가량 걸렸다고 하는데, 선생이 이렇게 빨리 무수정으로 작곡한 일은 없었다고 한다.

1945년 8월 15일, 동래의 중학생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했다. 그저 만세만 외치고 있는 행렬을 보던 선생은 이중희 교사에게 작시를 부탁하여 '새노래'를 작곡했다. "삼천리 강산에 새 빛이 트는 날"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이튿날부터 부산의 모든 거리에서 행진곡으로 불려졌다.

유엔(UN)군이 부산역에 도착하던 날에는 건국준비위원회의 요청으로 환영행사에서 관악대와 합창단을 지휘했다. 혼란한 시국을 살아온 시민들의 눈에는 무질서해 보이는 새로운 군대였었는데, 선생의 지휘로 미국 국가가 연주되자 군인들이 일제히 관악대와 합창단을 향해 거수경례를 붙였다. 5만이 넘는 환영시민이 이 광경을 지켜보며 놀랐다. 시민들 중 누군가가 선생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마술사요." 이 일은 선생에게 음악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지 또 한 번 느끼게 했다.

베토벤 어머니의 묘앞에 선 금수현 선생(왼쪽), 노래비 '그네'의 기둥(오른쪽)

베토벤 어머니의 묘앞에 선 금수현 선생(왼쪽). 노래비 '그네'의 기둥은 낙동강의 흐름을 표현했다.

선생은 음악 못지않게 한글을 사랑했다. 자신의 이름인 김수현을 금수현으로 바꾸고, 갓 태어난 아들 이름을 '금나라로 지었으며, 이후에도 난새·노상·내리·누리 등 자녀들에게 한글이름을 지어주었다. 경남여고 재직시절에는 'ㄱㅕoㄴㅏㅁ'이라는 한글을 풀어 쓴 마크를 창안해 학생들에게 달게 했다. 음악용어를 '다섯줄', '높은 음자리표', '이음줄', '음표', '쉼표' 등과 같이 순한글로 바꿔 여러 학교에 프린트해서 배포하고, 당시 문교부 최현배 편수국장에게도 보냈다. 1946년에는 문교부 음악용어제정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어 가선(加線)을 덧줄, 강약을 셈여림, 종지를 마침, 소절을 마디 등 한글로 바꾸는 데 기여했다.

같은 해에 '경남음악협회'를 결성하고 경남음악콩쿠르대회, 음악주보 발간 등을 통해 음악의 저변확대를 꾀했다. 콩쿠르는 피아니스트 백건우를 비롯한 많은 음악인재를 발굴해내는 등용문역할을 했다.

1970년에는 음악잡지 '월간음악'을 창간, 1992년까지 무려 22년 동안이나 발행했다. 이 잡지는 음악저널리즘을 보급하며 척박했던 한국음악계를 이끌어갔다. '음악교과서' '표준음악사전' 등의 저서는 음악교육사에 남는 업적이다. 선생은 필생의 작품인 오페라 '장보고'를 3여년의 각고 끝에 완성하고, 1992년 8월 31일 7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두 아들 금난새, 금노상 씨가 지휘자로 활약 중이며, 금누리 씨는 조각가로 활동하고 있다.

선생은 고향을 사랑했다. 대저초등학교에 피아노를 기증하며 "개교 60년 만에 처음 생긴 피아노"라는 교장의 말에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KBS TV의 '내고향 지금은'에 출연하여 대저의 생가와 수로왕릉·허왕후릉과 농촌풍경, 비닐하우스 등을 촬영하기도 했다.

현재 부산 대저동 사덕마을 앞 낙동강제방둑에는 부친 금수현 선생을 기리며 누리 씨가 직접 디자인 설계한 노래비 '그네'가 세워져 있다.

김해문화의전당 공연사업팀장
장은익 씨가 전해주는 작곡가 금수현

오페라 '장보고' 작곡
착상 기발한 선각 음악가

장은익 팀장

장은익 팀장이 '금수현 나의 시대 70'을 펼쳐보고 있다.

"금수현 선생님은 작곡가로, 합창지휘자로, 음악학자로 한국음악사에 큰 업적을 남기며 어려운 일도 쉽게 풀어가는 아이디어맨으로서 착상이 기발한 선각 음악가였습니다."

장 팀장은 중학교 음악시간에 가곡 '그네'를 배우면서 '금'이라는 독특한 성을 가진 음악인, '월간음악'이라는 한국최초의 음악잡지를 만든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부산상고에 입학한 후에 학교 대선배님이라는 걸 알았을 때 기뻤다는 장 팀장도 음악인의 길을 걷게 되며 인연은 계속되었다. 부산상고 졸업생들이 참가한 백양음악회에서 금수현 선생을 뵈었다. "선생님 댁에서 전혜금 여사님의 피아노 반주로 '그네'도 직접 불렀습니다"라며 옛 추억도 전해준다.

성악활동과 더불어 음악기획 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지금은 선생을 기리는 작업들을 전개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2019년이면 금수현 선생님 탄생 100주년이 됩니다. 음악연주가로 음악기획자로서 지역 음악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음악 발전에 큰 역할을 하신 선생님에 감사의 보답으로 업적을 기리는 기획 작업을 늘 구상하고 있습니다"라는 장 팀장은 생가복원과 작곡 후 무대에 올리지 못한 오페라 '장보고'를 세상에 내놓는 작업을 생각하고 있다. 금수현 선생이 태어난 김해에서 '금수현음악제'를 여는 꿈도 꾼다. "김해문화의전당이라는 훌륭한 공연장이 있지 않습니까. 김해시와 시민들의 마음이 모인다면 언제라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장 팀장은 오늘도 금수현 선생님이 태어나고 활동하신 김해와 부산을 오가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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