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의 독립투사들

작성일
2018-08-29 10:46:03
담당부서 :
가야사복원과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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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환(曺正煥, 녹산)은 만주에 가서 독립단의 자의부장이 되었고, 다물단(多勿團)을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강원석(姜元錫, 진영)은 의열단사건에 연루되어 2년 간 옥살이를 했으며, 노석호(盧奭鎬, 생림)는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였습니다. 징역3년을 선고받고 신경(新京)에서 복역하던 중 옥사하였습니다. 배치문(裴致文, 한림)은 삼일운동 때 목포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옥고를 치른 뒤,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3년 임시정부의 국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였고, 국내로 들어와 활동하다 다시 옥고를 치루었습니다. 신간회 목포지회장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1942년 5월에 옥사하였습니다. 1983년 한림면사무소 앞에 공로를 적은 비가 세워졌습니다.  이윤재(李允宰, 김해읍)는 영변에서 삼일운동을 주도하여 평양형무소에 투옥되었고, 1924년 북경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27년 조선어학회『우리말 큰사전』의 편찬에 참가하였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 투옥되어 1943년 12월에 옥사하였습니다. 1991년 봉황동 김해도서관 앞뜰에 흉상과 비가 세워졌습니다. 허윤송(許潤松, 삼정)은 16세 되던 1934년에 만주로 건너가 대한독립단에 입단해 봉천 길림에서 활동하다, 중국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광복군제1지대에 예속되어 일본군의 병참선을 공략하였으며, 광복군대장으로 노하구 남양지구에서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김구의 밀명으로 일본에 건너가 관동군헌병사령관이었던 아오키(靑木)를 저격했으나 실패하고 오사카형무소에 복역하다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습니다. 노백용(盧百容, 생림)은 통의부사건에 관련되어 징역2년을 선고받고 부산에서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안효구(安孝駒, 진례)는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 중에 삼일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의사개업을 버리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습니다.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의 송기송(宋基松)은 국내에 파견되어 김해 등에서 군자금을 모으다 붙잡혀 징역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반양환(潘良煥, 가락)은 징병으로 끌려 갔다가 탈출해 광복군으로 활약하였고, 이윤희(李允熙, 주촌)는 홋카이도(北海道)로 징용되어 와니시(輪西)제철소에서 노동자 2천명의 폭동을 주동하다 징역 3개월 집행유예 3년의 선고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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