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시보

김해시보 제 809 호 3페이지기사 입력 2017년 03월 02일 (목) 08:46

삼일절 특집 김해의 인물

일제강점기 김해의 은인 '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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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발(1874~1931)선생은 일제에 강점당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살다 간 선각자적 인물이었다.
 김해에 학교를 세우고, 김해의 경제를 위해 일했고, 독립운동 자금으로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세월이 많이 흐른 탓에 그를 기억하고 이야기를 전해줄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으나, 선생이 남긴 업적만은 김해에 오롯이 남아있다. '김해의 은인'으로도 불리는 허발 선생.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살펴보자.
 허발은 1874년(고종 11년) 김해군 활천면 마마리 192(현 안동)에서 허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허관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부지런하고 검소한 생활로 집안을 일으켰고, 일가친척은 물론 이웃까지 돌보며 한 생애를 살았다. 허발은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주며 이웃들의 가난을 떨쳐내려 애썼던 부친을 보며 자랐고, 그 성품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서울에서 학업을 마친 허발은 고향인 김해로 내려와 곡물상과 정미소를 운영하며 사업능력을 키워나갔다. 1918년 곡식 100석을 매입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반값으로 판매했다. 구휼사업을 펼친 것이다. 이 일은 매일신보(1918년 10월 24일)에 기사로 실렸다.
 1918년부터 진영에서 시작한 곡물상은 겉으로 보기엔 분명 '김해평야의 만석꾼'인 허발의 곡물상이었다. 그러나 이 곡물상을 통해 서울이며 인천 등지로 엄청난 쌀이 실려 나갔으되, 한 푼의 돈도 돌아오지 않았다. 허발의 손녀 허해옥 씨는 그 일과 관련해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할머니에게만은 독립운동가인 '김 씨'를 만나고 왔다고 말씀하셨다 합니다. 친구들이 그 많은 쌀 판 돈을 다 어떻게 했느냐고 물으면, 서울의 기생방에 갔다왔다면서 웃으셨답니다."
 할머니는 1926년 임시정부 창설 이후에야 남편에게서 '김 씨'가 김구 선생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허발은 오늘날의 김해합성초등학교를 세운 교육자이기도 했다. 김해합성초등학교 본관 입구 왼편에는 지난 1967년 '허발 박석권 선생 공적기념비'가 세워졌다.    
 허발은 1929년 7월에 학교에서 '김해 한글 강좌'도 열었다. 1928년 4월 15일에는 김해군민 대운동회가 합성학교에서 열렸다. 암울한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던 당시의 김해사람들은 마음껏 달리고 외치며 가슴 깊이 억눌린 분함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오늘날 '가야문화축제'의 시원은 이 대운동회가 아니었을까?
 나라가 다시 일어서려면 국민이 배워야 한다는 신념으로 교육에 힘쓰는 한편, 허발은 김해를 위한 사업에도 마음을 쏟았다. 많은 업적 중에서도 낙동강에 최초로 세워진 '낙동장교(구포다리)'의 가교지점을 김해와 가까운 구포에 유치한 일을 살펴보자. 이 다리를 놓을 때 가교지점을 구포로 할지, 사상으로 할지 의견이 둘로 갈리었다. 허발은 낙동장교의 가교지점을 구포에 세우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허해옥 씨는 "할아버지는 다리의 준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나, 다리가 준공된 이후 김해 사람들은 합성학교 교정에서 할아버지의 영정을 모시고 보고회를 가졌다"고 전했다. 낙동장교는 지난 2008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허발은 1931년 6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동아일보는 '김해의 은인 허발 씨 영면, 지난 12일 56세로 합성학교장으로 거행'이라고 보도했다. 장례식에는 김해 뿐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문상객이 모여들어 허발의 죽음을 애도했다. 허해옥 씨는 "마마리 본가인 상가에서 장유의 장지까지 가는 동안 500m마다 상을 놓아 문상객을 접대했다. 5만여 명이 넘는 문상객이 몰려들었는데, 사람들마다 이런 장례는 처음 본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허발의 마음은 교육ㆍ경제ㆍ사회 각 분야는 물론 독립운동에까지 고루 미쳤는데, 궁극적으로 김해사람들을 식구처럼 아꼈던 '김해의 은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김해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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