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석 김종대 선생은 1873년 김해 상동면 대감리 외가에서 아버지 창수(昌壽)공과 어머니 분성 배씨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아석은 6세 때 부친과 외조부 배환에게 글을 배웠고, 외종조부 차산 배전으로부터 사서삼경과 시문서화(詩文書畵)를 배웠다. 글씨와 그림이 뛰어나 향리에서는 아석을 천재라 불렀다.
세월이 흘러 20대를 갓 넘긴 아석의 서화를 본 흥선대원군이 크게 칭찬하며 만나기를 청했다. 대원군은 아석을 불러 손자 문용의 서예공부를 부탁했다. 아석은 대원군과의 교유로 서화 예술에 대한 감각을 더욱 높였다.
아석은 32세 때 법부주사로 등용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했으나, 34세 때 김해로 낙향했다. 일제의 강압에 의한 단발령에 항의하여 사직한 것이다.
동료들 중 홀로 끝까지 단발령을 거부해 사직한 이 일은 당시 관보신문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아석의 글씨와 그림은 이미 당대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서예도 뛰어나지만 아석의 사군자화는 '김해 문인화맥'의 전형적인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아석의 문인화는 차산 배전으로부터 출발해 대원군을 통해 안목을 넓혔고, 근본적인 추사 김정희의 서화 정신과 닿아 있다.
아석 서화예술의 맥은 제자인 수암 안병목에게 이어졌고, 이후 현대의 운정 류필현과 한산당 화엄선사에게 이어졌다.
아석은 만년에 고향인 한림면 수조마을에 강학 서당 '거연정'을 짓고 후학들을 양성했다.
격변의 시대에 살았던 아석은 많은 시와 글씨, 그림을 남기며 마지막까지 조선 선비로서의 삶을 지켰다.
1949년 9월 18일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1천여 명의 사림들이 운집해 유림장을 거행했고, 후학들이 주도해 '거연정유계'가 결성되고 현재는 유림들이 석채례를 봉행하고 있다.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