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가야, 낙동강에서 영산강으로 발표 내용

任那加羅와 慕韓

소속 :
德島大
발표자 :
東 潮
작성일
2006-04-13
1 廣開土王碑─고구려의 南下 문제─

廣開土王의 남하와 金海 大成洞 古墳群
고분군의 존속 시기는 3세기 후반부터 5세기 후반으로 그 중심 시기는 4세기 후반부터의 약 1세기간이다. 바로 광개토왕비문에 보이는 고구려의 남하 시기에 해당한다. 그 남하와 金官國 멸망과의 관계, 金官加耶 수장권의) 이동 등이 주목되어 왔다. 高句麗가 百濟·新羅를 침공한 논리, 倭의 「渡口破百残」「侵入帯方界」의 虛實, 「任那加羅」(金官加耶) 國의 실태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廣開土王碑文』의 釋讀을 제시한다.

任那四縣과 己汶, 帶沙를 둘러싼 百濟와 大伽耶

소속 :
경북대
발표자 :
박천수
작성일
2006-04-13
日本書紀 繼體기 6년(512년)조에 백제가 使者를 파견하여 任那四縣을 청하니 이를 할양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또 繼體기 7년, 백제가 使者를 통해 청하자 己汶, 帶沙를 주었다. 이에 伴跛가 반발하여 子呑과 帶沙에 성을 쌓아 滿奚에 연결하고, 爾列比, 麻須比에도 성을 쌓아 麻且奚와 推封에 연결하였다. 繼體기 27년(529년), 백제왕이 下口多唎國守 積惠押山臣에 일러 使者들이 항상 섬을 돌아올 때마다 풍파에 시달려, 가지고 가는 것이 파손되므로 加羅의 多沙津을 청하게 하였다. 이를 백제에 주었더니, 加羅王이 대대로 내려오는 나루터임을 강조하며 부당하다 하였으나 결국 백제의 것으로 하였다.

6세기 전반 가야·백제·왜 상호관계

소속 :
부산대
발표자 :
백승충
작성일
2006-04-13
400년 고구려 남정(이하 ‘남정’이라고 함)을 계기로 가야 소국이 본격적으로 ‘가야제국’으로 발전하고, 종래의 김해 가락국을 대신하여 새로운 중심국으로 가라와 안라가 등장하였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즉 가라국 혹은 안라국 중심의 ‘가야지역연맹’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남정이 한반도 남부지역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적어도 가야사의 측면에서 보면 결과적으로는 북방의 선진세력·선진문물과 직접 접촉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 가야와 왜가 고구려와 대립하고 있었던 백제의 우호세력으로 표면화되어 국제사상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는 점, 가라국이라는 신흥 유력국의 등장에 의해 종래 가야의 정신적·물질적 기반이었던 낙동강을 벗어나 서부경남 내륙 및 해안과 섬진강유역, 그리고 전남해안지역까지 그 경역을 넓히고 있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5~6世紀의 韓半島 西南部와 九州

소속 :
宮崎大
발표자 :
야나기사와
작성일
2006-04-13
근년 서부 경남(가야 서부 제지역)의 제 지역에서 왜계 횡혈식 석실을 채용한 고분의 발견이 잇따르고, 또한 백제의 왕도인 충청남도 공주와 부여에서도 왜계 횡혈묘가 발견되는 등 고대의 한·일 교류사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축적되고 있다.

갑주를 통해 본 4∼6세기 동아시아 제국의 교류

소속 :
중국사회과학원고고연구소
발표자 :
왕외
작성일
2006-04-13
4세기에서 6세기경 중국 동북의 요녕성, 길림성과 한반도 및 일본열도에는 각각 모용선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및 왜인이 활약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정권을 세웠으며 상호 빈번한 각종의 교류를 행하였다. 우호관계가 좋았던 시기가 있기도 하였고 어떤 때는 극렬하게 싸우기도 하였다. 이 시기 동아시아는 복잡하고 이해관계가 얽힌 국면이 첨예하였다. 아래의 본문에서는 이 지역에서 출토된 갑주의 비교분석을 통해 이 시기 동아시아의 교류과정과 역사적 배경과 원인, 계기를 분석하도록 하겠다.

5-6世紀代 榮山江流域圈의 政勢 變化 -長鼓墳을 中心으로

소속 :
전남대학교
발표자 :
임영진
작성일
2006-04-13
영산강유역권은 삼국시대에 상당한 기간동안 백제와 병행하면서 독자적인 분구묘가 성행하였던 지역으로서 백제와는 구분되는 문화를 보여주는 한편 장고분과 분주토기 등 일본과 관련된 자료들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
일반적으로 고대 일본의 대외교류에 있어 가장 중요한 대상은 백제라고 보고 있지만 일본에 백제와 관련된 자료들이 들어오기 전에는 영산강유역이나 가야지역과 관련된 자료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웅진백제 이후이며 그 이전까지는 가야권이나 영산강유역권이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喇嘛洞墓출토 馬具에 대하여

소속 :
遼寧省文物考古研究所
발표자 :
전립곤
작성일
2006-04-13
1988년 요녕성 북표현문관소(北票縣文管所)가 라마동(喇嘛洞) 삼연문화묘에서 금동 마구 한 세트를 수집한 이후 이 분야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93∼1998년 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遼寧省文物考古研究所)는 라마동의 삼연문화묘에 대해 다섯차례 발굴을 진행하였는데, 발굴을 통해 대량의 금속마구가 출토되었다. 이 중 안교편(鞍橋片) 3세트【1】,1995년 발견된 1세트【2】,1988년과 이전시기 수집한 것【3】 등 라마동 삼연시기 묘에서는 모두 6개의 금속 안교편이 출토되었다.

古代 東北亞 沿岸航路와 榮山江·洛東江流域

소속 :
木浦大
발표자 :
강봉룡
작성일
2006-04-13
동북아 연안항로란 중국의 동해안변을 따라 북상하여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의 묘도열도를 거치고 요동반도의 노철산을 경유하여 한반도의 서해안과 남해안을 따라 가다가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에 이르는 항로를 말한다. 횡단항로나 사단항로가 새로운 상시 항로로 개척되어 본격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통일 이후로 여겨지며, 그 이전인 삼국시대까지는 연안항로가 동북아 문물유통의 가장 중요한 교통로로 활용되었다. 삼국시대까지 횡단항로나 사단항로는 조선술과 항해술이 미진하여 극히 제한적으로 이용되었고, 육상교통로 역시 무력 충돌의 통로로는 빈번히 이용되었을지 몰라도 평화적 문물교류의 통로로는 활용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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