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외관계] 왜구방어의 거점

작성일
2018-08-28 18: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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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부터 극성부리기 시작하는 왜구를 방어하던 유명한 거점의 하나가 김해였습니다. 읍성과 분산성이 축조되는 것도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정종6년(1040)에 김해부(金海府)에 성을 쌓았고, 고종38년(1251)에는 왜구를 대비해 금주(金州)에 성을 쌓았다고 전합니다. 고려 말에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고 대비했던 사람이 김해부사 박위(朴 )였습니다. 『고려사』열전에 따르면 밀양출신의 박위는 우왕 때 김해부사로 부임해 황산강(낙동강)과 남포(南浦, 화목동) 등에서 왜구를 쳐부수고 분산성(盆山城)을 쌓았습니다. 경상도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어 고령 등에서 왜구를 격파하였으며, 요동정벌 때는 원수가 되어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하였고, 전함 100척으로 쓰시마(對馬島)를 공격하여 왜선 300척과 해안의 건물을 다 불살랐고, 고려사람 남녀 100여 명을 찾아 데려왔습니다. 최근에는 채색벽화가 그려진 그의 무덤이 밀양에서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분산성은 김해 중심의 분산(330m) 정상에 띠를 두르듯 돌로 쌓아올린 산성입니다. 『김해읍지』는 옛 산성을 돌로 다시 쌓은 것이라 전하는데, 조선 말(1871년)에 김해부사 정형석이 개축한 것이 약 900m 가량 남아 있습니다. 주로 경사가 완만한 시내 쪽에 성벽이 쌓여져 왜적의 침략을 읍성에서 견디지 못하게 될 때 올라와 장기적으로 저항하던 농성(籠城)입니다. 정몽주(鄭夢周)는 「분산성기(盆山城記)」를 지어 박위의 축성을 치하하면서 “가야의 옛터에 세워진 새 성에서 술을 들고 축하하겠다” 하였습니다. 금주의 군사는 경상도에서 세 번째로 많았습니다. 보승(保勝) 188명, 정용(精勇) 278명, 일품(一品) 431명 등 총 897명이 주둔하던 남해안 왜구방어의 중요한 기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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