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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뫼 허웅<상>.

작성일
2018-10-05 13:20:57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
2903
  • 허웅.jpg(9.3 KB)

눈뫼 허웅

눈뫼 허웅

서슬 퍼런 일제의 억압도 한글 향한 열정 못이겨
평생을 '한글사랑 나라사랑'에 바친 한글학자 눈뫼 허웅(상)

김해는 한 나라의 도읍이 될 만한 기운을 가진 땅이었다. 이 땅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 중에는 큰 인물들이 많았다. 나라를 위해, 학문과 예술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 이름은 알려졌으되, 김해 출신이라는 것을 잘 모르는 경우도 있다. 특히 그 업적과 성과가 세상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김해뉴스>는 창간 1주년을 맞아 '발굴-김해인물열전' 시리즈를 시작한다. 새롭게 '인물'을 발굴하기도 하겠지만 기존에 알려진 인물들의 업적을 새롭게 조명해 세상으로부터 정당한 평가를 받게 하는 데 초점을 둘 것이다. 독자 여러분들의 관심과 참여를 기대한다.

'세종대왕께서 지으신 한글을 한힌샘 주시경이 국어학의 주춧돌을 놓았고, 외솔 최현배가 집을 지었으며, 눈뫼 허웅은 그 집을 말끔히 보수하는 구실을 했다.' 국어학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평생을 '한글사랑 나라사랑'으로 일관한 삶을 살았던 허웅(1918~2004) 선생은 김해 사람이다. 허웅 선생은 알지만, 김해사람인 줄은 몰랐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김해뉴스>는 이번 호에는 생활인으로서의 허웅 선생 모습과 김해 사랑의 마음을, 다음 호에는 교육자와 학자로서의 면모를 더듬어 보려 한다.

1918년 동상동에서 태어나고 자라
김해보통학교 거쳐 동래고보 진학 고보 3학년 때 국어공부 매진 결심
1945년 김해에서 지역민 한글강습 등 자신의 모든 것 건 또다른 독립운동

허웅 선생은 김해 동상동 965번지에서 1918년 7월 26일, 부친 허수 모친 윤영순의 5남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해보통학교(현 김해동광초등학교. 23회)를 졸업한 허웅 선생이 생전에 여러 매체에 남긴 글에서는 고향인 김해를 사랑하는 마음을 많이 느낄 수 있다.

"내 고향은 경남 김해이다. 옛날 가락국의 서울이었던 김해이다. (중략) 나는 내 고향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랐다. 무슨 자랑거리가 있느냐고 반문할 사람이 많으리라 생각되나, 첫째 자랑거리는 거기가 옛 서울이라는 것, 그래서 김수로왕의 왕릉이 읍내 한가온데 있고, 북으로는 허왕후의 왕릉이 있다는 것이다. 김해 주변의 다른 고을 어디에 이런 자랑거리가 있을까? 다음으로 자랑이 된다고 생각한 것은 김해평야다. 그 넓은 김해평야에 누른 벼가 익어 갈 때면, 나는 만장대에 올라 그 금빛 벼바다를 내려다보며 그 사이를 누비고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줄기에 내 어린 낭만을 적셔보기도 했다."(농민신문. 1979. 4. 2.)

낙동강 줄기에 낭만을 적셔 보던 소년 허웅은 동래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동래고보 시절에는 럭비와 축구선수로 활동할 만큼 활발하고 건장했으나, 2학년 때 폐결핵으로 1년간 휴학을 했다. 김해의 집에 돌아온 아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본 어머니 덕분에 건강을 되찾은 후 3학년에 복학하면서 국어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핍박했던 일제강점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한글 연구에 매진한 것은 또 다른 형태의 독립운동이었을 것이다.

선생은 일제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창원 용원 사설 강습소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고, 김해 읍내의 산업조합에서 서기 노릇도 했다.

1942년 혼인을 한 선생은 부인 백금석 여사와 용원에서 신혼생활을 하던 때의 추억을 담은 시도 남겼다. '너무나 적막하고 /밤이면 늑대 소리, /김해읍 가려면은 /물길 물길 걸어야 해. /그래도 신혼살이 꿀맛만 같았었지.' 2002년에 이 시를 쓸 때 선생은 부인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십여리 길을 걸어 고향 김해로 가던 일을 떠올렸다고 한다.

1944년에는 김해읍 논실마을(현 대성동 2구 본부락) 333번지에서 첫 아들 황이 태어나는 기쁨도 누렸다. 광복을 맞았으나 한글교육을 받지 못해 우리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선생은 1945년에 김해에서 한글 강습소를 열고 강사로 활동했다. 김해에는 어쩌면 허웅 선생에게 한글을 배운 어르신이 아직 살아계실지도 모른다. 허웅 선생은 이렇게 김해에서 한 가정을 이루고 한글 강습을 시작했다.

1947년부터 1954년까지 부산대학교에서 교수로 후학들을 가르치던 선생은 이후 서울에서 생활했다. 서울에 살면서도 김해를 자주 찾아왔고, 늘 고향인 김해를 자랑했다고 한다.

허웅 선생이 살았던 동상동에는 허웅 선생의 육촌 재종 아우인 허정(78) 씨가 아직 살고 있다. 허웅 선생의 생가가 있던 자리 분성로 345-22에는 현재 원룸이 들어섰다. "큰집을 중심으로 반경 100여m 안에 양천허씨 일가들이 모여 살아서 사촌, 육촌들도 함께 우애를 나누며 자랐지요." 허정 씨는 "형님은 공부를 할 때, 창문이나 문에 이불을 둘러쳐 놓고 했습니다. 공부에 집중하려고 한 것도 있지만, 당시에는 공습이 수시로 있었으니 바깥으로 불빛이 새어나가면 안되는 시절이기도 했습니다"라며 옛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만약 학자가 안되었다면, 성악가나 가수가 되었을 겁니다. 가곡을 부를 때는 모두들 감동에 젖곤 했습니다."

허웅 선생은 등산을, 그것도 눈오는 겨울산을 좋아했다. 그런 선생을 보면서 동기들과 제자들이 '눈뫼'라고 호를 지었다. 눈뫼의 뜻은 전 홍익대 총장 이항녕 박사가 바친 추모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눈보다도 희고 희고 뫼보다도 높고 높다 허다한 길을 두고 한글에 몸을 바쳐 웅대한 겨레 구원의 꿈 일워질 날 멀잖아.'

앨범과 책을 넘기며 옛 추억을 들려주던 허정 씨는 선생이 마지막으로 김해를 방문한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김해 출신 영문학자 김종출 박사의 문학비가 국립김해박물관 앞 문화의거리 솔밭에서 제막식을 하던 2002년 10월 18일이었습니다."

선생은 평생 의지하고 은애했던 부인 백금석 여사를 2001년 11월 먼저 보내고, 2004년 1월 26일 10시 13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6세였다. 한글학자로서 큰 업적을 남겼고, 고향을 사랑했던 허웅 선생이지만, 허웅 선생을 낳은 김해에는 아직 선생을 기리는 작은 기념물 하나 없다.

막내아들 허원욱 교수가 기억하는 허웅 선생 "김해를 늘 그리워하셨던 아버지"

허웅 선생은 백금석 여사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김해에서 태어난 첫아들 황은 울산대학교 화학과 교수로 정년퇴임 했다. 서울에서 차남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난 원욱은 문법론을 전공한 국어학자로, 현재 건국대학교 충주캠퍼스에서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허원욱 교수는 아버지 허웅을 이렇게 전해주었다. "신혼시절 용원 앞 바닷가에서 어머니만을 위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주셨답니다." 기타도 잘 치고 노래도 잘 불렀던 낭만적인 모습은 허 교수도 기억하고 있었다. "한 달 월급을 전부 모아 기타를 살 정도로 기타를 좋아하셨답니다. 저도 어렸을 적 아버지가 부르시던 노래 '성불사', '가고파'를 듣곤 했지요."

선생의 삶은 한글 연구 그 자체였다. "집에서는 말씀이 별로 없으셨습니다. 항상 아침에 일어나시면 한 두 시간 서재에서 공부를 하셨습니다. 학교 강의를 마치고 난 뒤에 일이 있으면 약주도 하셨지만, 약속이 없으면 일찍 귀가하셔서 또 책을 읽으셨어요. 어린 저도 '아버지는 학자'라고 생각했을 정도니까요."

"아버님은 고향 김해를 자주 말씀하셨고, 늘 그리워하셨습니다." 허 교수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학자로서의 모습, 예술을 사랑하는 낭만주의자, 고향 김해를 자랑스러워하고 그리워했던 눈뫼 허웅 선생의 모습을 되살려주는 소중한 추억들이었다.

허웅 선생
강의 중인 허웅 선생의 모습. 선생에게서 강의를 들었던 많은 후학들이 오늘날 국어학자가 되어 또 다른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을 것이다.
사진제공=김해문화원
허웅 선생
동래고보를 다니던 청소년기에는 럭비와 축구팀에서 주장으로 활동했다. (뒷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허웅 선생
방안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인자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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