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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뫼 허웅<하>.

작성일
2018-10-05 13:23:46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
2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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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뫼 허웅

눈뫼 허웅

"나랏말은 정신이며 겨레문화의 원동력이다"
평생을 '한글사랑 나라사랑'에 바친 한글학자 눈뫼 허웅(하)

동경제국대 입학 수순 마다하고 외솔 재직 연희전문학교 진학 일제가 최현배 선생 체포하자 중퇴 후 독학으로
국어 연구 부산대·서울대 등 교수 재직하며 언어과학적으로 한글 분석·연구
국어문법 체계 확립하고 정착시켜 저서 수십권 서술하며 후학 양성

"한 방 가득 둘러서 있던 책꽂이와, 그 안에 가득한 책들, 낡은 책에서 배어 나오는 향긋한 종이 냄새, 책상 위의 원고지. 그 속에서 조용히 앉아 무언가를 읽고, 쓰고 계시던 할아버지, 할아버지…." 허웅 선생의 맏손녀 허누리 씨가 추모문집에 남긴 글 중 한 대목이다.

이번 호에서는 한글 사랑과 학문 연구로 일관했던 허웅 선생의 학자로서의 면모를 더듬어 본다. 선생의 업적, 저서, 논문을 연대순으로 열거만 해도 이 지면이 다 차버릴 것이다.

선생이 동래고보에 재학하던 시절, 교사들은 우수한 제자인 허웅을 동경제국대학 진학의 수순으로 동경제일고등학교 입학을 추천하려 했다. 그러나 허웅 선생은 이를 마다하고 외솔 최현배 선생이 재직하던 연희전문학교를 선택했다. 한글을 배우고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1938년, 열여덟이었다.

일제의 핍박이 날로 심해지던 시절, 선생은 오직 한글을 생각하는 삶을 선택했다. 외솔의 '우리 말본'을 읽었고, 학우들과 비밀독서모임을 이끌면서 항일 의지를 길렀다. 그 결정이 21세기인 지금,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연희전문에 입학한 다음 해 외솔이 일제의 압력으로 교수직에서 파직되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자 선생은 혼자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1940년 중퇴하였다. 이때부터 선생은 독학으로 15세기 국어를 연구하며 세계의 저명한 언어학 이론을 공부했다. 8·15광복과 동시에 고향 김해에서 한글강습소를 열어 우리말과 우리글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선생은 1947년 9월 서른 살의 나이에 대학 교수가 되었다. 부산대학교 교수로 출발하여 성균관대학교 연세대학교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그들이 오늘날 전국의 강단과 교단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는 국어학자가 되었다. 선생은 한글을 언어과학적으로 분석·연구하여, 세계의 그 어떤 문자보다 한글이 우수함을 알렸다. 허웅 선생의 업적과 이름은 국내에서보다 세계의 언어학자들에게 더 높이 인정받고 있다.

현재 한글학회 이사를 맡고 있는 하치근 동아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는 "허웅 선생은 우리 국어를 언어학 이론에 입각하여 연구한 공적이 크고, 세계적인 학자들이 경탄하는 인물입니다"라고 말한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했고, 한힌샘 주시경이 현대학문으로서의 바탕을 만들고, 외솔이 그 기반을 닦았습니다. 허웅 선생은 홀로 영어·독어·불어·일어·중국어 5개 국어를 익히며 언어학 이론 원서를 연구했습니다. 구조언어학의 바탕 위에서 국어문법의 체계를 확립하고 정착시켰습니다. 허웅 선생의 노력이 있어 한글이 세계 언어학자들로부터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 교수의 설명이다. 구조언어학이란, 언어의 구성요소 간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그 구조를 기술·해명하려는 근대언어학 이론이다.

자주·자립적 국어학의 초석을 놓은 주시경, 국어문법의 체계를 세우고 애국적 계몽주의 국어학을 확립한 최현배에 이어, 허웅 선생은 국어학을 언어과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학자로 세계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하 교수는 허웅 선생과의 인연이 남다르다. 동아대 재학 시절 허웅 선생의 강의를 들으며 국어학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고, 졸업 후 김해중학교와 김해여고에서 근무했다. 당시 허웅 선생은 한글학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한글학회는 여러 지역에 지회를 설립했다. 조건은 지역에서 국어를 연구하는 대학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 때만 해도 김해에는 대학이 없었다. 그러나 허웅 선생의 고향인 김해에 한글학회 지회가 없다면 말이 되느냐는 의견에 힘입어 김해지회가 결성되었다. 1975년에 열린 전국학술발표회에서 하 교수는 쟁쟁한 교수들 사이에서 김해여고 교사로 발표회에 나섰다. 발표가 끝난 후 날아드는 날카로운 질문들에는 허웅 선생이 직접 나서 설명도 해 주었다. 그리고 며칠 후 "공부를 계속해 국어학자로 새 출발을 해보라"고 권유하는 엽서를 보냈다. 하 교수는 허웅 선생의 엽서 덕분에 교수가 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선생께서는 좀 뒤처지는 제자에게도 꾸짖지 않고 보살펴주시며, 스스로 정해진 길로 가도록 인도해주시고 기다려 주시는 너그러운 분이셨습니다"라고 스승을 그리는 마음을 표현했다. 그리고 현재 한글학회 김해지회의 활동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 했다.

허웅 선생은 생전에 이런 말씀을 강조했다. "한 나라의 말은 그 나라의 정신이며, 그 겨레의 문화 창조의 원동력이다." "한글은 우리 겨레와 민중을 위한 글자로 태어난 것이다." "우리 말글과 문화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는 것에서 나아가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창동 전 문화부장관은 선생의 영전에 "이 모든 말씀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리고 이 땅을 이어갈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말과 글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일러주고 계신 것"이라는 말을 바쳤다.

허웅 선생은 수십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국내 최초로 음운학의 공시적·통시적 체계를 세운 '국어음운론'(1958), 최초의 언어학 개론서인 '언어학개론'(1963), 15세기 국어문법을 서술한 '우리옛말본'(1975), '국어학-우리말의 오늘, 어제'(1983), '20세기 우리말의 통어론'(1999) 등 지금도 후학들에게 보배롭게 읽히고 연구되고 있는 책들이 많다.

선생은 연구와 저술에도 전심전력을 다하였지만, 훌륭한 후학들을 길러냈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서 한글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서 허웅 선생의 제자, 제자의 제자가 아닌 이를 찾기가 더 힘들 것이다. 선생은 삼십여 년 간 한글학회를 이끌며 반석에 올려놓았고, 한글전용론을 주장하고, 한글날 공휴일 폐지 반대운동을 펼치는 등 평생을 한글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지병으로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을 때도 한글학회 사업을 챙길 정도로, 선생은 마지막까지 한글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눈뫼 허웅 선생은 이 땅에 와서 돌아가시는 날까지 오롯이, 우리 말과 글을 위해 살다 간 높고 큰 산이었다.

생전에 외솔상(1973), 국민훈장 모란장(1973), 성곡학술문화상(1986), 세종문화상(1990), 주시경학술상(1993), 세종성왕 대상(1998) 등을 받았고, 2004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허웅 선생 기념사업 추진 김국권 경남도의원
"생가터 표지석 하나 없어 … 기념관 지어 한글학당 열 것"

김국권 의원은 2011년 1억5천만 원, 2012년 2억의 도비를 확보했다. 김 의원은 "생가가 있던 자리인 분성로 345-22에는 원룸이 들어서 있어 현재로선 생가를 복원하기는 힘들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김 의원은 "생가를 복원하는 것만이 다는 아니다. 한글학자인 선생의 뜻을 생각한다면 김해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 이주민과 다문화가족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일도 중요하다"며 좀 더 구체적인 계획을 말했다. "김해시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고, 김해문화원에서도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한글학회에도 연락을 하고 여러 의견을 모아, 허웅 선생의 뜻에 맞는 기념관을 지어 한글학당을 여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며 앞으로의 사업 방향을 설명했다. "나 역시 김해동광초등학교를 졸업한 김해사람으로서 허웅 선생을 뒤늦게 알았다는 것이 부끄럽다"는 김 의원은 생가터를 돌아보았다. 세계적인 언어학자이며 한글의 큰 기둥인 허웅 선생이 태어난 김해의 생가터에는 작은 표지석 하나 세워져 있지 않은 실정이다.

허웅 선생 허웅 선생
허웅 선생은 우리 말글과 문화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는 것에서 나아가 살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진제공=김해문화원
김해의 옛집 마당에서 김해여고 학생들과 함께 한 허웅 선생 김해의 옛집 마당에서 김해여고 학생들과 함께 한 허웅 선생. 1976년 10월 17일의 모습.
1976년 한글회관 건립 기공식에서 말씀 중인 허웅 선생 1976년 한글회관 건립 기공식에서 말씀 중인 허웅 선생. 한글회관은 1977년 10월에 완공, 개관됐다
허웅 선생의 생가터에서 기념사업 계획을 설명하는 김국권 도의원 허웅 선생의 생가터에서 기념사업 계획을 설명하는 김국권 도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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