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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눌 노상직.

작성일
2018-10-05 13:32:13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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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눌 노상직

소눌 노상직

목판 위에 새겨 남긴 우리 전통과 얼
1885~1931 '성호문집' 책판 간행 / '파리장서' 서명 소눌 노상직

이번호 '인물열전'은 지난호 대눌 노상익의 아우인 소눌 노상직(小訥 盧相稷 1855~1931)의 삶을 다룬다. 소눌은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한 어려운 시대에 김해, 밀양, 창원, 창녕 등지에서 조선의 선비로서 지조와 양심을 지키며, 수많은 후학들을 길러냈던 분이다. 소눌은 영남유학자 중에서도 성호 이익의 학통을 따르는 실학자이며, 당대의 석학이었던 성재 허전의 문인이었고, 독립운동가였다.

15세 향시 응시 과거 수차례 명성 부친·스승 타계후 독서·강학 전념 밀양에 '자암초려' 짓고 후학강론 경술국치 후 망명생활하다 귀국 1931년 '성호문집' 책판 찍어내 밀양시립박물관 목판수장고 전시

소눌이 저술과 강학을 펼쳤던 자암서당
소눌이 저술과 강학을 펼쳤던 자암서당.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4호로 밀양시 단장면 무릉리에 있다.
박정훈 객원기 punglyu@hanmail.net

소눌은 1855년 김해의 한림면 금곡리(소눌 출생 당시 금곡리는 생림면에 속해 있다가, 지난 1983년 한림면으로 편입)에서 극재 노필연 공을 부친으로, 대눌 노상익에 이어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소눌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다. '소눌편년'에 의하면 5세에 '효경'을 배우기 시작해 7세에 '소미통감(少薇痛鑑)'을 읽었고, 10세에 '대학'과 '중용'을 배웠다. 11세에 김해 부사로 부임한 성재 허전 문하에서 대눌과 함께 수학하였으며, 성재가 타계할 때까지 21년간 공부했다. 11세에 소눌은 '논어'와 '맹자'를 읽었으며, 12세 때 '시전'을, 13세 때 '주역'을 읽었다.

성재는 소눌의 총명함을 귀하게 여겨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주었다. '그대는 가학에 젖어 있고 성격은 순실하며 기상은 견실 확고하다. 눌변이나 실천에 재빠르며 젊은 나이로 성리학에 뜻을 두도다.' 소눌과 대눌의 호에서 눌(訥)은 성재가 글에서 남긴 '訥於言'에서 비롯되었다.

소눌은 15세에 형 대눌과 함께 향시에 응시하고, 이후 서울에서 한성시에 입격하는 등 과거에서도 이름을 높였다. 그러나 31세에 부친상을 당하고, 이어 스승인 성재가 타계한 이후로는 과거에 응하지 않고 오직 독서와 강학에 전념했다.

소눌 묘비 김해 한림면 금곡리 입구에 서 있는 소눌 묘비
소눌문집책판 밀양시립박물관 전시용 목판수장고에 보관된 '소눌문집책판'.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76호)
소눌문집책판 밀양시립박물관 전시용 목판수장고에 보관된 '소눌문집책판'.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76호)

소눌은 산청과 창녕에서도 강학을 하였고, 42세 때 밀양군 단장군 노곡리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자암초려'를 짓고 후학을 위해 강론을 했다. 밀양읍에서 80여리 떨어진 곳, 옛날에는 말을 타고도 하루를 가야 했던 곳이란다. 표충사 가는 길, 단장면사무소 앞에서 우회전하여 한참을 들어가면 두 개의 마을이 나온다. 남쪽이 무릉골, 동북쪽 산언덕에 노곡마을이 있다. 이 지역 산의 돌이 붉다 하여 강학 장소에 '자암'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소눌이 강학을 하는 동안, 인근 고을에서 소눌의 학문을 흠모한 학도들이 몰려들어 그들을 위해 임시 건물을 지어야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하여 자암초려의 강학은 중단되었다. 만주 땅으로 망명한 형 대눌을 따라 소눌도 서간도 안동현으로 옮겨 망국의 한을 개탄했다. 이곳에서 아들 식용(寔容)을 잃고 1913년 다시 밀양 금곡으로 돌아온 소눌은, 이듬해 마을 어귀에 자암서당을 짓고 다시 강학을 시작했다. 자암서당은 지금도 남아 있어 그 융성한 학풍을 짐작하게 한다.

소눌은 강학을 다시 여는 한편, 선현의 문헌을 간행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소눌은 자신의 저서와 문집을 집필하는 틈틈이 선현들의 문집을 교감하고, 발간했다. 소눌이 교감한 문집은 '이자수어', '한강속집', '간송속집', '계당집', '용어 성재집' 등 여러 권이다. 63세인 1931년에 성헌, 이병도, 허채 등과 함께 방대한 '성호문집'을 책판으로 찍어 간행했다. 소눌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소눌의 문집과 저서를 책판으로 찍었다. 그 책판은 현재 밀양시립도서관에 보관 중이다.

문헌간행에는 우리민족의 정신과 전통을 후세에까지 승계·보존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책을 보존하는 것만도 중요하고 힘든 일이다. 그러니 책판을 제작했다는 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목판이 필요하고, 각수가 판각을 해야 하며 엄청난 비용이 소요된다.

일제 강점기인 당시에는 이미 활자본 출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굳이 책판을 제작하고 목판으로 한 것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밀양시립박물관 김재학 학예사는 "우리의 전통을 지키고자 한 것"을 그 첫 번째 의미로 꼽았다. 둘째는 '보존'이다. 활자본은 책을 만들고 난 뒤에 활자를 해체한다. 납활자의 경우는 그대로 녹여버린다. 그러나 책판은 남게 된다. 판각을 한 각수의 공이 배인 예술성도 빼놓을 수 없다.

김재학 씨는 "책판은 그 자체로서 문화재입니다. 다시 만들 수도 없습니다. 손도장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수많은 글자를 새기려면 얼마나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겠습니까. 글자 하나가 틀리면 그 판 전체를 대패로 밀고 다시 판각을 했습니다. 단 한 자라도 틀리지 않고 선현의 말씀을 온전하게 새기겠다는 선조들의 의지였지요"라고 설명했다.

밀양시립박물관 2층 전시실에서는 '성호문집'과 '소눌문집'의 책판을 볼 수 있다. 전시용 목판수장고는 우리나라 박물관 중에서 밀양시립박물관이 유일하다. 비록 유리창 밖에서 지켜보아야 하지만, 한 자 한 자 새겨진 일부 목판을 실제로 볼 수 있다. 힘들고 고단한 시대를 살면서도 민족정신을 지켜나간 선조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소눌은 자암서당 안에 '전심각'이라는 방을 따로 두고 '성호문집'과 성재의 문집 등을 간행하고 반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경성대 한문학과 정경주 교수는 논문 '소눌 노상직의 생애와 학문경향'(동양한문학연구, 제18집. 2003)에서 소눌이 서적 간행과 관련한 시를 남겼다고 밝혔다. "그 시에 이르기를 '서책 가운데 천고의 마음을 전하나니/ 노년이 되어 되씹으니 다시 더욱 깊어지네/ 돌이켜 보면 시대 바뀌어 말마저 오래 사라지기에/ 날마다 책 새기는 걸 내 책임으로 삼았네'라고 하였다. 이처럼 소눌은 사문의 학문을 선양함으로써 문화전통을 보전하고 계승하는 기풍을 진작하려는 고심에서 평생을 통하여 서책의 편찬 강행을 멈추지 않았다." 소눌의 서적 간행은 우리나라 출판문화사에서도 큰 업적이다.

소눌의 업적 중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조선의 유림들이 국제사회에 조선의 실상을 알린 '파리장서'에 서명한 일이다. 1919년 기독계와 불교계가 주동한 가운데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유교계는 대대적인 장서운동을 일으켜 이에 호응하기로 했다.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상황을 고려할 때 이 문서에 서명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건 일이었다. 명망 있는 학자들 중 많은 이들이 이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소눌은 평소의 신념대로 서명하였다. 전국유림대표 137명이 이 문서에 서명하였고, 후일 많은 고초를 겼었다.

소눌이 71세 되던 해 순종이 승하했다. 소눌은 문을 닫고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1930년에 마산에 나와 머물다 지병으로 1931년 1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사후 오랜 시간이 흘러 파리장서운동의 공을 인정받아 소눌은 애국지사로 '건국포장'을 받았다. 김해 한림면 금곡리에 잠들어 있던 소눌은 지난 2009년 6월 23일 국립대전현충원 애지제4-51 묘역에 안치되었다.

자암서당과 소눌문집 책판
만주 망명생활서 돌아와 후학 1,000여명 양성 18년간 저술 '소눌문집' 책판 도유형문화재

경남 밀양시 단장면 무릉리(무릉2길 28)에 위치한 '자암서당(紫岩書堂)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4호로 지정되었다. 소눌이 망명지인 만주에서 돌아와 저술과 후진양성을 위해 마련했던 서당이다. 소눌은 이 곳에서 높은 학덕으로 1천여 명에 달하는 후진을 양성했다.

밀양시립박물관 목판수장고에 보관 중인 소눌문집 책판은 1979년 12월 29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76호로 지정되었다. 소눌이 1913년 망명지 만주에서 돌아와 18년 동안 저술한 문집으로 규모는 48권 목록 1책을 합해서 25책이고, 판목은 1천113장이다. 소눌 사후인 1934년 밀양 노곡에서 문인들이 간행하였다.

소눌의 주요 저서에는 인명사전 '동국씨족고(東國氏族攷)', 교육용 교과서 '여사수지(女士須知)', 역사지리서 '강역고(疆域攷)'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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