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김해 펼침 수산물 방사능 안전정보 본문상단으로 이동

김용환 화백.

작성일
2018-10-05 13:34:11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
4618
  • untitled.png(37.0 KB)

김용환 화백

김용환 화백

한국만화 최초의 '캐릭터'와 촌철살인의 풍자
시사만화 '코주부' 그린 종합미술가(1912~1998) 김용환 화백

신문에 시사만평이나 시사만화가 없다면 그야말로 '팥소 없는 팥빵'이 아닐까.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시사만화는 그 당시의 사회적 흐름을 대변해 준다. 우리나라의 역대 시사만화로는 '고바우 영감'(김성환), '두꺼비'(안의섭), '왈순 아지매'(정운경), '나대로 선생'(이홍우), '한겨레 그림판'(박재동), '피라미' '어리벙'(안기태), 그리고 '코주부'(김용환) 등이 있다. 시사만화 '코주부'를 그렸던 김용환(1912~1998) 화백은 김해에서 태어났다.
김 화백은 시사만화뿐만 아니라 어린이만화와 여성만화도 그렸다. 펜화가, 삽화가, 역사풍속화가, 표지 장정가, 만화발행인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친 김용환 화백은 종합미술가였다.

1912년 진영에서 태어나 만화 답안지로 동래고보 입학 사립 데이고쿠 미술학교 진학 후 일본 3대 소년잡지에 삽화 그려 천재 펜화가로서의 명성 날려 표지그림·풍속화 작품 등도 남겨 진영의 큰 과수원집 장손으로 태어나 한국만화의 큰 획을 그었던 김용환 화백.

큼지막한 코, 콧수염, 파이프 담배, 단장과 모자를 든 '코주부'는 허세를 부리고 잘난 체하다 금방 골탕을 먹는 모습으로 웃음을 선사하는 캐릭터이다. 만화가 채 정착하지 못했던 시대에 김용환 화백의 손끝에서 태어난 코주부는 한국 만화 최초의 캐릭터였으며, 1950년대 가장 인기 있는 만화 주인공이었다.

김 화백은 1912년 진영에서 큰 과수원을 운영하는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김 화백은 어렸을 적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다. 월간종합잡지 '신태양'(1949년 창간~1959년 폐간:당대의 대표적인 종합잡지) 1954년 3월호에 김용환 화백은 '나는 왜 만화가가 되었나'라는 산문을 실었다. 그 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원래 우리 집에는 다소 예술적인 무슨 혈통이 있었는지 조부가 한학자로 특히 시와 서를 잘했으며 가친은 시골에서 명필이라고 하였으며 그림도 묵화를 잘 그려 동리 사람들 청에 의하여 병풍 같은 것을 잘 그려주었다."

김 화백은 또 "내가 만화를 그릴 줄 몰랐다면 지금쯤은 틀림없이 거지가 되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별로 영리한 두뇌의 소유자는 되지 못하여 소학교 때와 중학교 때 두 번이나 낙제를 하였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미술의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한 그가 어찌 영리한 두뇌의 소유자가 아니었을까.

부산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입학시험의 일화는 흥미롭다. 이과시험의 문제에 대한 답을 쓸 수 없었던 소년 용환은 답안지에 당시 '조선일보'에 연재되고 있던 노수현의 만화 '멍텅구리와 윤바람'을 그려 제출했다. 이 그림이 한 교사의 눈에 띄어 그 교사의 선처로 동래고보에 입학했다.

동래고보를 졸업한 후 김용환은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사립 데이고쿠 미술학교 제1회생으로 양화과에 입학했다. 이 때 김용환은 학교 급우로부터 '너는 데생이 정확하니 잡지에 삽화를 그려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는다. 김용환은 '기타코지'라는 필명으로 일본의 3대 소년잡지에 삽화를 그리며 천재 펜화가로 명성을 날렸다.

광복 직후 창간 서울데일리뉴스에 '코주부' 연재하며 시사만화 창안
국내 첫 만화단행본 '홍길동의 모험' 만화잡지 시초 '만화행진'
천연색 슬라이드 '성웅 이순신' 등 현대만화 시금석 발자취 남겨

김용환은 광복이 되고 난 뒤 1945년 9월 16일 창간된 일간영자신문 '서울데일리뉴스'에 시사만화 '코주부' 연재를 시작하며 시사만화가로서의 행보를 시작했다.

김수기(현실문화연구 대표) 씨는 "김용환은 진정한 의미에서 시사만화의 창안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해방공간에서 시사만화로 특출한 성과를 쏟아냈다"고 평가한다. 정세에 대한 정확한 판단, 정치적 입장,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명료함 등 현대적인 그림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팔선 블루스 세계사 속 한국의 현실을 그린 시사만평 '삼팔선 블루스'
시골마을의 씨름 장면 시골마을의 씨름 장면을 그린 이 풍속화에는 고향 진영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코주부 한국만화 최초의 캐릭터이며 1950년대 가장 인기있는 주인공이었던 '코주부'

김 화백이 1947년 1월 1일 동아일보에 발표한 만평 '삼팔선 블루스'는 한 여인의 상반신은 소련군이, 하반신은 미군과 함께 춤을 추고 있는 장면이다. 광복은 되었으나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단되고야 말 았던 나라의 운명을 김 화백이 짐작이라도 한 것 같다. 한 컷의 그림에 담겨 있는 메시지는 간결하고 단호하다.

김용환 화백이 세상의 사물을 바라보고 읽어내는 혜안과 촌철살인적 표현은 후대의 예술가들에게도 큰 감흥을 주고 있다. 판화가 주정이 씨는 "김용환 화백은 한국현대만화의 시조이다. 코주부가 뉴욕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많다, 높다, 넓다'라는 세 마디로써 미국의 일상을 압축한 것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다"며 "한참 활동할 때는 우리나라 예술인 중 소득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그 유명한 소설 '자유부인'을 쓴 정비석 씨가 2위였다니 코주부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용환 화백은 최고의 어린이 만화가이기도 했다. 1945년 신성문화사가 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만화 단행본 '홍길동의 모험'이 김 화백의 작품이다. 김 화백이 그림으로 시작한 최초의 일들은 그 외에도 많다. 우리나라 최초로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만화도 그의 작품이다. 1946년에는 경향신문 창간호에서 '미쓰 꽈리'를, 1948년 국제신문 창간에는 또 다른 여성만화 '깡통여사' 연재를 시작했다. 같은 해 9월에는 최초의 만화잡지 '만화행진'을 발행했으나, 문교부 탄압으로 2호로 폐간되고 말았다.

1952년 11월 월간잡지 '학원'의 창간호에서 연재를 시작한 만화 '코주부 삼국지'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많은 독자들이 기억하는 김 화백의 대표작이다. 시사만화가 윤영옥, 만화가 허영만 등이 '학원'에서 '코주부 삼국지'를 보며 만화가가 되기로 작정했다.

박재동 화백은 "내가 김용환 선생의 그림을 처음 대한 것은 우리 고모나 삼촌이 쓰던 1954년판 교과서 '도의생활' 책에 실린 김용환 선생의 삽화였다. 어린 마음에도 정말 잘 그렸다는 생각이 들어 중학교 때는 그 그림을 여러 장 베껴 그리기도 했다"라고 회고했다.

1959년부터 미군공보지 '자유의 벗'의 표지그림과 삽화를 그렸고, 달력 그림으로 풍속화도 그렸다. 우리 전통 풍속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 '한국의 민화(일본에서 발행·1980)', '그림한국사(전 10권·계몽사·1988~1990), '한국의 풍속화(민문고·2002)' 등을 펴내면서 그림으로 역사를 기록했다.

지난 2007년에는 KBS 1TV 'TV쇼 진품명품'에서 김 화백이 1958년 제작한 천연색 슬라이드 연작 '성웅 이순신'이 발견되면서 국내 최초 만화영화의 역사를 다시 썼다.

김 화백은 생전에 남긴 글에서 "그림을 빼면 나에게는 아무런 주변도 수단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그린 그림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동안 평생 붓을 잡았던 김 화백은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로 점점 커져갔다.

김용환 화백은 1995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대한민국은 이듬해 그에게 '한국만화문화대상 공로상'을 수여했다. 1998년 12월 1일 코주부 김용환은 향년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2005년 부천만화정보센터에서 '코주부 삼국지'를 복간하고, 대표작 전시회를 개최했다. 김해에서는 2007년 12월 19일부터 31일까지 '김해를 빛낸 예술가 시리즈 Ⅲ-코주부 김용환 전'을 열어 고인을 기억했다.

김해문화의전당 전시교육팀 이영준 팀장이 말하는 '코주부' "김해 사람 김용환이 남긴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죠"
역사풍속화

김용환 화백은 역사풍속화도 많이 그렸다. 장수의 용맹이 실감나는 그림 한 폭.

이팀장은 지난 2007년 '김해를 빛낸 예술가 시리즈 Ⅲ-코주부 김용환 전'을 기획했다. "김용환 선생이 남긴 예술적 성취는 매우 큽니다. 만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훌륭한 작품들입니다"라고 설명했다.
2007년 당시에 많은 시민들이 "그 유명한 '코주부'가 김해사람이었어?"라며 전시회를 찾았고, 김해사람이라는 자부심에 묵직한 감동을 받았단다. 이 팀장은 "당시 전국 각지의 개인소장가들이 가지고 있던 작품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고, 전시가 끝난 후에 다시 돌려주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코주부'는 김해인 김용환이 탄생시킨 문화적 자산입니다. '코주부'라는 캐릭터는 우리나라 만화예술의 중요한 콘텐츠입니다. 김해에서 김용환 선생의 작품을 소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기사를 취재하던 중 만난 한 미술가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김해보다 '코주부'가 더 유명하지 않나요? 도시브랜드나, 대표 캐릭터를 억지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요?"라고.


페이지담당 :
문화예술과 문화팀
전화번호 :
055-330-3211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