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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뫼 이윤재.

작성일
2018-10-05 13:36:24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
5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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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뫼 이윤재

한뫼 이윤재

출생지 : 경남 김해부 우부면 답곡리(현재 김해시 대성동)

약력

  • 국어학자 · 사학가 · 독립운동가. 경상남도 김해 출생. 호는 환산(桓山) · 한뫼. 용준의 아들이다. 김해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김해 합성학교(合咸學校)에서 교편을 잡은 뒤, 다시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에서 수업하였다. 1913년부터 마산의 창신학교(昌信學校) · 의신여학교(義信女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평안북도 영변의 숭덕학교(崇德學校) 교사로 재직 중 3 · 1운동에 관련되어 평양 감옥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1년 중국에 건너가 북경대학 사학과에서 수업한 뒤 1924년 귀국하여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를 거쳐 협성(協成) · 경신(儆新) · 동덕(同德) · 배제(培材) · 중앙(中央) 등의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 1927년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의 조선어사전 편찬위원이 되었고, 민족정신의 보전 · 계승을 위한 잡지 《한빛》을 편집, 발행하였다. 1929년 조선어연구회 · 조선어사전 편찬위원회의 집행위원, 1930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이 되어 국어통일운동의 중진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31년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를 맡았으며, 이해부터 4년간 여름마다 동아일보사 · 조선일보사 등에서 벌인 하기 한글강습회 강연차 지방을 순회하였다.
  • 1932년에는 조선어학회의 기관지 《한글》의 편집 및 발행 책임을 맡았으며, 1934년에는 진단학회(震檀學會)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감리교신학교에서 강의를 맡았으며,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의 사정위원이 되고, 1936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의 편찬전임 집필위원이 되었다.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修養同友會事件)에 관련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약 1년반 옥고를 치른 뒤, 1939년 대동출판사(大同出版祉)에 근무하였다. 1941년 기독신문사 주필로 일하면서 한글 보급과 우리말사전 편찬에 주력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동지들과 함께 홍원경찰서에 붙잡혀 함흥형무소에서 복역중 옥사하였다.
  • 1947년 유고 《표준한글사전》(大同女化社, 1953)이 간행되었다. 이는 조선어학회에서 발표한 '한글맞춤법 통일안'과 사정된 '조선어표준말모음'을 기준삼아 처음으로 엮은 것이다. 그밖에 《성웅 이순신(聖雄 李舜臣)》(漢城圖書株式會社, 1931), 《도강록(渡江錄)》(朴趾源 作 抄譯), 《문예독본(文藝讀本)》(震光社, 1931 · 1932) 등의 저서가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추서되었다.
출처:국어국문학자료사전, 이응백ㆍ김원경ㆍ김선풍 교수 감수, 1998, 한국사전연구사

살아도 죽어도 조선을 위하여 …
한평생을 조국에 바친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 한뫼 이윤재

한글백일장은 대한민국 땅 어느 곳에서든 열리고 있지만, 김해의 한글백일장은 특별하다. 올해로 15회를 맞게 될 이 백일장은 김해문화원에서 한뫼 이윤재 선생을 기리며 열고 있는 행사이다. 한뫼 이윤재(1888. 12.24.~1943. 12.8.)는 한글을 지키기 위해 갖은 고초를 겪었던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고, 민족의 얼을 지켜가는 후세대를 길렀던 교육자이며 민족사학자였다. 한평생을 조국에 바친 선생은 일제에 의해 참혹한 고문을 받고,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외동 나비공원 기념 조형물 한뫼 이윤재 선생 외동 나비공원 기념 조형물의 부조에서 한뫼 이윤재 선생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박정훈 객원기자 punglyu@hanmail.net
김해도서관에 세워진 선생의 흉상 김해도서관에 세워진 선생의 흉상.
한글과 독립을 위해 뜻을 모은 동지들과 함께 있는 선생의 모습 한글과 독립을 위해 뜻을 모은 동지들과 함께 있는 선생의 모습도 기념조형물 부조로 새겨져 있다.

1888년 현재의 대성동에서 탄생
22세때 김해합성학교에서 교사생활 하며 교육계몽운동 시작
주시경 사숙하며 한글연구 매진

한뫼 이윤재는 1888년 12월 24일 경남 김해부 우부면 답곡리(현재 김해시 대성동)에서 부친 용준 씨와 경주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한뫼·한메·환산(桓山) 등으로 불렸다. 여섯 살에 한문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총명함과 재능이 뛰어나 신동으로 인근 고을까지 이름이 났다. 당시 조선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일본의 침략과 서양문물이 함께 밀려들던 그 때,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신학문을 전수하는 계몽운동가들의 활동도 생겨났다. 선생은 신학문의 필요성을 느끼고 늦은 나이에 김해공립보통학교(현 동광초등학교)에 입학, 21세에 졸업했다. 이듬해 김해합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며 교육계몽운동에 동참했다.

선생은 곧이어 대구의 계성학교에서 고등과정을 배웠다. 이때 기독교에 입문하고 우리말과 글, 우리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한뫼가 평생 걸어가야 할 길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평북 영변 숭덕학교 재직 중 만세운동 주도해 평양감옥서 옥고
출옥 후 북경서 신채호 등도 만나 수양동우회·조선어학회 활동하다
옥고 치르며 갖은 고문에 시달려

선생은 1913년 마산창신학교와 마산의신여학교에서 우리글과 국사를 가르쳤다. 우리말과 한글의 전문적 이론 연구와 후진 양성으로 한글의 대중화와 근대화에 개척자 역할을 하고 있던 주시경을 사숙(존경하는 사람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는 없으나 사람의 도(道)나 학문을 본으로 삼고 배우는 것)하며 한글학자로서의 의기도 키웠다.

우리글과 조선의 역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했던 일제의 핍박에 굴하지 않고 민족 교육자로서의 길을 걸었던 선생은 1919년 평안북도 영변 숭덕학교에 재직중에 이 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출옥한 뒤에는 잠시 마산에서 머물다가 6월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에서 신채호(독립운동가·사학자·1880~1936)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을 만났다. 신채호의 영향을 받아 북경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여 3년간 근대 역사학을 공부했다. 1924년 다시 귀국한 선생은 우리글을 연구하고 지키는 한글학자로, 민족적 역사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자이며 독립운동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정주 오산학교에 근무할 때 수양동우회(안창호가 조직한 흥사단 계열의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했다. 서울협성학교에 근무하던 1926년에는 수양동우회에서 펴내는 잡지 '동광(1926.5~1933.1)'에 '쾌걸 안용복'을 발표했다.

"용복은 가슴 속에 서린 분한(憤恨)과 억울(抑鬱)을 참을래야 참을 수 없이 혼자 스스로 한탄만 할 뿐이었다. '아아 세상에 어찌 공리가 있다 하리오. 저 간세(奸細) 왜가 멀쩡하게 남의 땅을 빼앗으려 하건마는 이를 항의하려긴 고사하고, 돌이켜 그를 찾기로 애쓰는 자가 형벌을 받고 말았는구나. 아아 나는 조선사람이다. 살아도 조선을 위해 살고 죽어도 조선을 위해 죽을 것이다. 몸이 부수어지고 뼈가 닳아 없어지는 한이 있어도 나의 최초의 결심은 조금이라도 변할 리가 없다. 이제는 법리(法理)도 쓸데없고 론(論)도 쓸데없다. 다만 한 완력(腕力)만으로써 그들하고 싸움하여 죽기를 맹세하리라.' 이와 같이 든든한 결심을 하였다."

2012년 현재에도 우리는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을 보고 있다. 90여년 전 이윤재 선생이 어떤 마음으로 이 글을 썼을지, 얼마나 통분했을지, 감히 짐작해 본다. 위의 글 전문은 국회전자도서관(http://dl.nanet.go.kr/)에 회원가입을 하고 '快傑 安龍福(쾌걸 안용복)'으로 검색하면 무료로 읽어볼 수 있다.

1927년 선생은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의 전신)의 동지들과 국어사전 편찬을 위한 준비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민족정신의 발굴과 보전·계승을 위해 '조선 얼굴의 거울, 조선 마음의 거름'을 표방하며 잡지 '한빛'을 창간, 편집발행인으로 활동하면서 9호까지 발간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인사들과 함께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6개월간 옥고를 치른 선생은, 1942년 10월 최현배 이희승 등 조선어학회의 동지들과 다시 검거되었다. 조선어학회 인사들은 함경남도 흥원 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는데, 이윤재 선생은 남을 원망하거나 끌어넣지 않았다. 이를 일러 후일 노산 이은상은 선생은 '성인'이라고 표현했다.

임호산이 바라보이는 외동 나비공원에 세워진 한뫼선생 기념 조형물에 노산 이은상이 선생의 생애를 읊은 글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병, 가난, 한글, 독립, 감옥, 절개, 죽음, 영광, 영생, 이 말에 다신 주석 구태 찾아보고 싶소. 말 중에 이 여덟 낱말이 바로 당신 팔자시지."

한글과 독립운동을 위해 살다간 선생의 생애를 명료하고도 엄정하게 표현한 노산의 마음에 더 무엇을 보탤까.

기념조형물에는 조국의 독립을 갈망했던 이윤재 선생의 의지를 담은 '너희들은 독립을 보리라'도 새겨졌다.

"우리가 지금 일본의 총칼 밑에 눌려 산다고 언제나 이럴 줄 알아서는 큰 잘못이다. 나는 나이도 들었고 지금 형세로서는 감옥에서나 죽게 생겼지만 너희들은 대명천지 밝은 날에 내 나라 다시 찾고 독립국민으로 떳떳이 살 날이 꼭 올 것이다. 너희들은 틀림없이 독립을 보리라. 그러자면 지금부터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1929년 경신학교에서)."

일제강점기에 훼절한 인물들이 많았던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학생들에게 훗날 반드시 독립되리라는 희망과 의기를 불어넣어 준 이윤재 선생의 굳은 마음이 얼마나 귀한지 가슴이 뭉클해진다.

1943년 향년 56세로 옥중 순국
국어학자·독립투사 발자취 남겨

이윤재 선생은 수감생활 중 1943년 12월 8일 새벽 5시에 혹독한 고문과 추위와 주림에 시달리며 향년 56세로 옥중에서 순국했다. 1962년에 나라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1년에 김해도서관 앞 광장에 선생의 흉상과 어록비가, 2005년에 외동 나비공원에 기념조형물이 세워졌다. 매년 한글날 김해 시민들은 김해가 낳은 독립투사이자 국어학자·사학가로 평생을 조국에 바친 한뫼 이윤재를 기리고 있다.

인제대 박혜경 교수가 설계한
외동 나비공원 한뫼 기념 조형물

한글 자음 딴 조형물
독립운동 상징 태극문양

김해문화원 옆에 위치한 외동 나비공원에는 한뫼 이윤재 선생 기념 조형물이 있다. 이 조형물은 국가보훈처와 김해시의 지원과 김해문화원 주관으로 2005년 세워졌다. 설계는 인제대학교 디자인학부 박혜경 교수가 맡았다. 선생의 삶의 자취를 보존하고 민족정신을 상징적으로 표출하여 후세들에게 물려주는 기념물이어야 한다는 기본 방침 위에서 작업이 이루어졌다.

박 교수는 "미래를 이끌어가는 어린아이들부터 시민들 모두가 선생을 가깝게 느끼고 생각할 수 있도록 개방성, 접근성, 현대적 형상화 등을 염두에 두고 설계했다"며 "작업을 위해 한뫼 선생의 업적을 공부하는 동안, 살아계셨더라면 가장 훌륭한 한글학자가 되셨을 거라는 안타까운 마음과 존경심이 우러났다"고 말했다.

전통건축에서 사용되는 배흘림기둥 형태의 석주, 한글의 자음을 딴 조형물,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바닥의 태극문양 등 박 교수의 섬세한 설계는 주변과 어우러져 오가는 사람들을 순하게 안아 준다. 박교수는 "김해는 많은 문화 자산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김해의 공공디자인으로 활용하기 바란다"며 시민의 관심이 가장 큰 기본 자산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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