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의 성장] 가락국의 성장

작성일
2018-08-28 17:54:31
담당부서 :
가야사복원과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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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경이 되면 가락국은 철(鐵)의 생산과 해상교역을 바탕으로 눈부신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삼국지』에 철이 생산되어, 한(韓)과 예(濊), 낙랑(樂浪)·대방군(帶方郡), 그리고 왜(倭)까지 수출하였다고 전하는 가락국은 완성품의 수입에 의존하던 성립기에서 벗어나 철 생산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철이 중국의 화폐와 같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철을 매개로 한 해상교역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가락국은 규격화된 철 생산시스템을 갖추고, 다른 나라와 교역하는 철의 왕국이며 해상왕국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양동리고분군162·200·235호분의 판상철부(板狀鐵斧), 대성동고분군23·29호분의 판상철부와 2호분의 철정(鐵鋌, 덩이쇠) 등은 가락국의 철 생산시스템을 보여주는 것이며, 신라와 일본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가야의 철제품들은 가락국의 해상교역을 보여주는 물적증거입니다. 『삼국지』가 황해도 대방군에서 왜국에 이르는 바닷길을 전하면서 구야한국(狗邪韓國)-가락국을 중간 기착지로 서술한 것은 고대 동아시아의 중개무역항으로 등장하였던 가락국의 성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김해 회현리패총에서 출토된 화천(貨泉)은 A.D 9년에 주조되어 10년 정도밖에 통용되지 않은 화폐지만, 서북한, 일본 큐수북부∼오사카만까지 출토되고 있습니다. 2년 이상 걸렸던 항로의 곳곳에서 10년 밖에 사용되지 않았던 화천이 출토되고 있다는 것은 가락국을 중개무역항으로 한 고대 동아시아의 해상교역활동이 얼마나 빈번하였던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대성동고분군과 양동리고분군의 중국제 청동경(漢式鏡)과 청동솥(靑銅鼎)과 같은 중국계문물, 광형동모(廣形銅矛)와 방추차형석제품(紡錘車形石製品)과 같은 왜계문물들도 이를 증명해 주는 자료들입니다. 『삼국지』가 구야국(狗邪國) - 가락국을 대국(大國)으로 기록했던 것은 이러한 가락국의 성장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삼국지』는 대국의 인구를 4∼5천가(家)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3세기 경의 가락국은 2만∼2만5천 명 정도의 큰 나라였습니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 국호를 대가락(大駕洛)으로 칭했다는 것, 구간의 칭호를 일괄적으로 고쳐 관제(官制)를 정비했던 것, 『삼국지』에 법속이 특히 엄했다고 전하는 것 등은 이러한 가락국의 성장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4세기대 대성동고분군에서는 중국과 북방지역에서 들여온 금동제 허리띠와 같은 사치품들과 금동 청동제 장식 말갖춤새가 철제갑옷, 철제 말갖춤새와 같이 출토됩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가락국 왕실에 받친 바람개비모양 청동기등도 출토됩니다.  이러한 외래계제품들은 대성동고분군에서만 확인되어 가락국의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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