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의 쇠퇴와 멸망] 가락국의 멸망

작성일
2018-08-28 17:5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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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복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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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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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중엽까지 동래와 양산의 가야소국을 병합한 신라는 낙동강을 건너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475년에 웅진(熊津, 공주)으로 남하 한 백제도 섬진강 수계를 따라 동진 또는 남진하면서 서부의 가야를 압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백제는 6세기 초에 남원 등의 가야소국을 통합하고 529년에는 하동까지 남하하였고, 섬진강을 건너 아라가야(함안)을 위협하기 시작합니다. 신라와 백제의 침입에 직면한 가야의 여러나라들은 독립유지를 위해 연대하기도 하고, 백제와 신라 사이의 외교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에서 가락국의 움직임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6세기가 되면 가락국은 이미 신라의 영향에 들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가락국은 대가야(大加耶)나 아라가야와는 다르게, 자진 투항하였다. 신라는 무력과 회유의 수단을 병행하여 가야제국을 통합해 갑니다. 가락국의 왕족에게 진골의 신분을 주고 우대하였던 것은 회유책의 전형적인 예가 되었습니다. 신라는 가락국의 구형왕에게 김해지역을 식읍(食邑)으로 인정해 줌으로써, 아직 통합되지 않은 가야제국에 자진 투항을 권유하는 본보기로 활용하고자 하였던 겁니다. 구형왕의 증손인 김유신이 복속국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신라 조정에서 최고의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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