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회의 가락인] 김유신의 후예들

작성일
2018-08-28 18: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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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복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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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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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의 아들로 삼광(三光)과 동생 원술(元述)이 있었습니다. 원술은 문무왕 12년(672)에 당과의 싸움에서 패해 왕명을 욕되게 하고 가훈을 더럽힌 죄로 부모에게 버림받아 태백산에 숨어삽니다. 뒤에 매초성(買肖城, 양주)에서 당군을 대파하는 등 많은 공을 세우고 상을 받았으나 부모에게 용서받지 못함을 한탄하여 벼슬도 하지 않고 진주에 살았습니다. 지금의 진주김씨가 그 후손들이 됩니다. 김유신의 손자 윤중(允中)은 성덕왕 24년(725)에 대아찬(大阿飡, 5품)으로 중시(中侍)에 임명되었는데, 733년에 당이 신라에게 발해를 치게 하면서 원정군지휘관으로 그를 지목해 오자, 성덕왕은 그의 동생 윤문(允文)과 함께 발해를 치게 했으나, 큰 눈으로 원정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김암(金巖)은 김윤중의 서손으로 당에 숙위(宿衛)로 유학하여 음양학을 배우고 스스로 둔갑법을 창안하기도 하였습니다. 귀국 후에는 사천대박사(司天臺博士)가 되어 천문과 역수를 맡아봅니다. 양주(良州)·강주(康州)·한주(漢州)의 태수를 역임하고, 집사시랑(執事侍郞)과 패강진의 두상(頭上)을 지내며 육진병법을 가르쳤습니다. 또 술법에도 능통해 황충(蝗蟲)이 패강진 일대를 덮치자 산마루에 올라 향을 피우고 주문을 외며 하늘에 기원하니 갑자기 비바람이 일어 황충이 모두 죽었다 합니다. 김암의 형제 김장청(金長淸)은 집사부(執事部)의 최하위 집사랑(執事郞)에 머물러 김유신 사후 100년 남짓에 그 가계가 매우 쇠락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김장청은 가계의 회복을 위해 김유신의 전기 『행록(行錄)』10권을 저술하였는데, 『삼국사기』김유신 전기는 이를 간단히 채록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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