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김해] 금주(金州)의 교통과 산업

작성일
2018-08-28 18: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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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복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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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에 따르면 전국의 교통망은 22도(道) 525역(驛)으로 나뉘어졌는데, 금주도(金州道)에는 31역이 딸려 있었다고 하며, 덕산(德山, 대동면 덕산리), 성잉(省仍, 진례면 산본리), 적항(赤項, 장유면 관동리), 金谷(한림면 금곡리), 대역(의창군 대산면)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낙동강을 건너 양산으로 나가는 덕산, 냉정I.C 북쪽에서 창원으로 가는 성잉, 남쪽으로 웅천·진해로 나가는 적항, 북쪽 삼랑진에서 낙동강을 건너는 금곡, 밀양 수산에서 낙동강을 건너는 대산 등 현재 김해에서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길의 바탕은 이미 고려시대에 확립되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수공업자들의 천민차별 마을을 향(鄕)·소(所)·부곡(部曲)으로 구분하였습니다. 김해에는 수다부곡(水多部曲, 대동 수안리), 제을미향(齊乙彌鄕, 장유 삼문리), 성화례향(省火禮鄕, 녹산 산양리), 달음포향(達音浦鄕, 대동 월촌리), 감물야향(甘勿也鄕, 대동 대감리) 등이 있어, 대동과 생림과 같이 철생산과 같은 산업을 담당하였습니다. 감물야향의 감물(甘勿)은 단물로 담금질을, 야(也)는 야철(冶鐵)을 각각 뜻하는 것으로 대동면의 대감(大甘)이나 감내(甘內)와 같이 지금의 지명으로 남았습니다. 충렬왕2년 10월에 원나라에 일본의 밤(栗)을 바치게 하였는데, 이는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조양필이 얻어 의안현(義安縣, 진영)에 심었다가 이때 열매를 맺었던 것이었습니다. 정종2년(947) 12월에 “금주(金州) 관내의 주현(州縣)들에 갑자기 큰물이 나 방축이 무너지고 민가들이 파괴되었으며 농작물들에 손해를 끼쳤다”는 해당 관의 보고를 보면 수해도 많았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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