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김해] 임진왜란의 발발과 피해

작성일
2018-08-29 10: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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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25년(1592) 4월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은 조선침략군을 편성하여 부산을 급습하여 동래와 양산을 함락시키고 18일에 제3군 쿠로다(黑田長政) 5천, 오오토모(大友義統) 6천, 모리(森吉成) 2천 등 총 13,000명의 왜군은 부산에서 다대포를 건너 김해의 죽도(竹島)에 진주하였고, 19일에 불암창(佛岩倉)까지 진출하여 김해성을 포위합니다. 왜병들이 조총을 쏟아 붓고 19일 밤에는 성내에서 내분도 일어나 20일이 되면 왜병의 총공격에 김해성은 무너지고 맙니다. 이 때부터 선조31년(1598) 11월 왜병의 철수까지 무려 6년 7개월 동안 김해는 왜군의 지배 하에 있게 됩니다. 마사(馬沙, 생림)·신답(新沓, 주촌)·죽도(竹島)·안골포(安骨浦)·웅천(熊川)의 왜성(倭城) 들은 이때 왜군의 노동력 착취를 통해 세워진 것들로 김해 사람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충무공이 불모산(佛母山)에서 왜병이 죽도·불암창·덕진교(德津橋, 주촌면 떳다리)에까지 집을 짓거나 셀 수 없이 막(幕)을 치고, 수 백 척의 왜선이 열을 지어 정박하고 있었음을 내려 다 보았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상황을 전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김해성에 밀어닥친 왜병들은 수로왕릉(首露王陵)을 도굴하려 하였습니다. 신병(神兵)이 일어나 왜병 모두를 죽였다고는 하나, 직장(直長) 허경윤(許景胤)이 향인을 데리고 봉분을 쌓았다든지, 『지봉유설』에서 왜구의 도굴 때 넓은 광(壙)속에서 장대한 골격의 주인공과 2명의 20세 가량의 여성 순장자(殉葬者)를 전하는 것을 보면, 이 난리에 수로왕릉도 큰 피해를 입었음이 짐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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