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의 김해] 정치·군사체재의 정비

작성일
2018-08-29 10:23:20
담당부서 :
가야사복원과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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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31년(1598) 9월에 부사 정기남(鄭奇男)의 부임하고 11월에 왜군이 철수하자 비로소 전후 복구에 착수하게 됩니다. 광해군8년(1616)에 창원에 있던 청천진(晴川鎭)과 신문진(新門鎭)을 진례와 장유로 옮겼는데, 이 두 진은 소모진(召募鎭)으로서 지금의 예비군훈련소와 같은 것으로 시기에 따라 불러모아 병력을 충당하는 진(鎭)이었습니다. 효종1년(1650)에 부사 박경지(朴敬祉)가 해창(海倉)과 대변청(待變廳)을 강서구 가락동 죽림에 짓고, 현종7년(1666)에 부사 김성(金城)이 중북촌(中北村, 진영읍 설창리) 화포천(花浦川) 가에 설창(雪倉)을 세웠고, 14년(1673)에는 부사 이행익(李行益)이 각 면에 사창(社倉)을 세워 1,200석을 비축하였습니다. 해창과 설창은 조세를 받아 보관하는 시설로, 해창은 수군의 무기를 보관하기도 하였고, 대변청은 왜구의 침입 같은 변란에 대비하는 기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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