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외전시관은 대성동고분군에서 최초의 왕묘라 할 수 있는 29호 목곽묘와 이것을 파괴하면서 설치된 39호 목곽묘를 발굴당시의 상태로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이들 양 목곽묘는 100여년의 시기차가 있어 무덤의 변화상을 서로 비교하여 알 수있고, 도굴을 당하지 않은 무덤이어서 부장품의 배치상태를 잘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대형무덤 사이의 중복현상은 대성동고분군의 가지는 특징 중의 하나일 뿐 아니라, 양 무덤에서는 금관가야문화의 진수를 알 수 있는 다양한 유물과 외래유물이 출토되어 금관가야문화의 출자와 원류를 이해하는데 주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29호와 39호 목곽묘의 재현모습

노출전시관 전체 사진

대성동고분군 무덤배치의 특징

본 대성동고분군에서는 2차에 걸쳐 분묘들이 중복축조되었음이 판명되었다. 제1차는 3세기말, 제2차는 5세기 초의 일이다.
이러한 분묘의 중복축조는 다른 지역에서는 좀처럼 유사 사례가 없는, 김해지역만의 특이한 현상이다.

제1차 분묘 중복축조는 이 무렵 김해로 갑자기 대거 유입된 순장•도질토기•북방계갑주•기승용마구 등의 북방문화를 근거로 이 문화를 소유한 북방주민이 김해로 이주함에 따라 전시기의 분묘를 파기하고 그들의 무덤을 축조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즉 특정 북방주민의 이주설이다.

그 외 분묘 중복은 친족관계에 있는 분묘들이라는 견해와 모지부족으로 인한 현상이라는 견해도 있다. 제2차 분묘축조현상은, 이후 대성동고분군을 비롯하여 김해지역에서는 지배자의 무덤이 축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금관가야의 쇠퇴를 이해하는데 극히 중요하다. 이곳 야외전시관의 부지에서도 많은 무덤들이 중복 축조되어 있었다.

대성동 29호와 39호 목곽묘는 이러한 중복현상의 한 사례이다.

29호와 39호 목곽묘의 재현모습 사진

29호와 39호 목곽묘

29호 목곽묘는 대형 목곽묘로서 3세기 말에 축조되었으며, 4세기 후반에 39호분이 북편에 축조되면서 거의 반정도가 파괴되었다.

무덤에 있어서 29호 목곽묘는 너비가 아주 넓은 것이 특징이며, 그와 달리 39호 목곽묘는 너비가 좁은 점이 비교된다.

출토된 유물에서도 차이가 보이는데, 29호에서는 와질격자문 항아리와 도질민무늬 두귀달린항아리 등의 토기와 청동솥이 출토되었으며, 시신이 놓인 바닥면에 도끼형덩이쇠가 깔려있었다. 39호에서는 아가리가 밖으로 꺾인 굽다리 접시와 갑옷, 투구, 창끝꾸미개 등이 출토되어 서로 다른 유물 갖춤새를 엿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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