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년 4~5 세기 동아시아 사회와 가야 발표 내용

4∼5세기 동아시아의 갑주

소속 :
부산복천박물관
발표자 :
송계현
작성일
2001-06-04
철제갑주가 고대국가 형성기에 있어서 군사력의 상징이다. 그러나 철제갑주의 출현이 본격적인 정복전쟁의 시작이라고 볼 수는 없다. 갑주가 개인의 방어용무기로서의 실용성보다는 권력의 중요한 상징물로 이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은주부터 갑주가 사용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기원후 4세기대 이후 철제갑주가 등장한다. 철제갑주의 등장은 단순히 우수한 방어구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철제갑주의 생산을 위해서는 철생산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뛰어난 단조 기술이 요구된다. 이의 구체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금속학적인 분석과 형식학적인 검토가 필요하며 실물자료의 확보가 우선되어야 한다.
일본의 고분시대에는 많은 갑주자료가 출토되어 다방면의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철제갑주자료가 증가하고 있으나 영남지역 특히 가야에 한정되어 있다. 고구려에는 실물자료는 매우 적으나 4∼5세기대의 생활풍속을 묘사한 벽화에 비교적 상세하게 갑주가 묘사되어 있다. 자료가 가장 영세한 지역은 백제다. 중국에서는 漢代의 철제갑주 실물자료가 비교적 많은
편이고 그 이후는 陶俑이나 壁畵, 畵像 에 묘사된 갑주가 있어 어느 정도의 변화상을 알 수 있다.
각지역의 갑주양상에 대한 비교 검토를 위해서는 실물자료의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료의 한계가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갑주가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4∼5세기대를 중심으로 전술의 변화와 그에 따른 갑주양상의 변화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4∼5世紀 國際情勢와 加耶聯盟의 變動

소속 :
홍익대
발표자 :
金泰植
작성일
2001-06-04
고대 통일제국을 완성하였던 중국은 4∼5세기에 북방에 들어와 있던 새외 민족들의 자기주장을 맞이하여 급격한 혼란에 빠져들다가 결국 남북조로 분열되었다. 반면에 중국의 주변에 있었던 만주, 한반도, 일본열도는 중국의 기미 정책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 시작하였고, 그런 와중에 극심한 변혁을 겪었다. 그러한 변혁의 소용돌이가 가야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까?
그러나 이 시기에 중국은 내분 때문에 주변 세계에 대하여 체계적인 기록을 남기지 못하였고, 가야와 왜는 아직까지 스스로의 기록을 남길 만한 문화적 축적을 쌓지 못하였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의 기록은 매우 소략하고 불안정하다. 그렇기 때문에 가야와 그 주변 사회의 4∼5세기 모습을 살피는 것은 무척 어렵다. 본고에서 그 모든 것을 명백하게 밝힐 수는 없다. 다만 4∼5세기 가야의 변동과정을 살피면서 그와 관련되는 주변 사회와의 여러 문제점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4∼5 世紀 倭 王權의 展開와 加耶

소속 :
日本 國學院 大學
발표자 :
鈴木 靖民
작성일
2001-06-04
본고는 3 세기∼5 세기 초두 무렵에 동아시아의 한 모퉁이를 점하는 일본열도에서 성립하고 전개되기 시작한 倭 王權(政權)의 王權構造와 政治·外交에 대하여 개관하고, 아울러 加耶를 비롯한 인접 諸國과의 관계에 대하여 언급한다.
日本 古代의 왕권구조와 국가형성을 고려할 때, 加耶, 그 이전의 諸韓國은 비교되어 더러 참조되었다.
여기에서는 그것과는 역으로, 加耶의 역사를 보기 위한 것으로서, 倭 王權의 전개와 그에 관련되는 동아시아의 움직임을 기술하고자 한다.

倭에서의 初期須惠器의 系譜와 渡來人

소속 :
澤大學
발표자 :
酒井淸治
작성일
2001-06-04
倭에는 고분시대 중기에 대륙의 고도로 발전한 문화와 기술이 전해졌다. 그 하나로 한반도로부터 전해진 토기생산이 있다. 토기생산 중에서 하나는 還元焰소성의 須惠器이고, 하나는 酸化焰소성의 연질토기이다. 이외에 瓦質土器로 상정되는 토기생산도 확인되고 있다. 神戶市 出合窯址에서 출토된 토기는 충청남도 천안시 청당동유적, 충청북도 진천군 삼룡리요지의 4세기후반 와질토기와 유사하고 요의 구조도 충청북도 산수리 87-8호 요지와 유사하다. 아마 須惠器가 전해지기 이전의 와질토기 또는 한반도계 와질토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窯를 1단계로 한다.
다음으로 大庭寺유적 (TG)231·232호 窯 등 최근 증가하고 있는 初現期의 加耶系 陶質土器의 系譜를 잇는 須惠器를 2a단계로 하고, [日本化한 須惠器]로 불리는 TK216호 窯의 須惠器를 2b단계로 해서 그 변천과 배경에 대해서 서술하고 또 系譜에 대해서도 검토하기로 하겠다.

4∼5世紀 加耶와 倭의 武器·武裝體系 變革과 그 背景

소속 :
忠南大 考古學科
발표자 :
禹在柄
작성일
2001-06-04
지난 1980년대부터 1990년대에 걸친 한국동남지역에서의 많은 발굴 성과 중, 특히 1∼5세기의 발굴 자료는 그 동안 불분명하였던 가야의 국가형성과정과 주변지역과의 교류의 실체를 규명하는데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다. 특히 김해 대성동고분군의 발굴은 4∼5세기 가야와 왜의 교류를 「임나일본부」로 표현되는 왜의 가야경영으로 보려는 시각을 깨뜨리는 결정적인 고고학적 성과였다. 또한 이러한 발굴성과로 4∼5세기 일본열도에서의 국가형성과정에 가야와의 철을 중심으로 한 교역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도 분명해 지고 있다.
필자는 이제까지 加耶와 倭의 국가형성과정을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본 무기·무장체계를 중심으로 분석하여 왔으며, 이 과정에서 4∼5세기에 한국동남지역과 일본서부지역에서 연동되는 급격한 무기·무장체계의 변혁이 있었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본고에서는 4∼5세기의 무기·무장체계 변혁의 원인을 분석하기 위하여 먼저 1∼3세기 한국동남지역과 일본서부지역의 무기·무장체계의 특질을 개관하였다. 그리고 4∼5세기 무기·무장체계 변혁의 양상과 그 배경을 고찰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4세기 무기·무장체계의 급격한 변혁의 원인과 배경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에 기인한 가야와 왜의 교역체계 변동과 관련지어 설명하였다.

5세기 東아시아 속의 加耶

소속 :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발표자 :
李鎔賢
작성일
2001-06-04
가야 연구에 있어서, 80년대이후 지금까지의 최대 성과는 이른바 <大加耶연맹>(田中俊明{大加耶連盟の興亡と[任那]}1992년8월) 혹 <後期加耶연맹>(金泰植{加耶聯盟史}1993년12월)에 대한 검출이며, 전체 가야 연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이는 공간적으로 경북 高靈을 중심으로 하여 연맹이 결성되어 국가(여기서의 국가란, 신라나 백제와 같은 통합의 레벨로 한정할 경우에 한함)직전의 단계에 까지 진전되었으며, 시간적으로 5세기후반에서 6세기전반에 걸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5세기는 동아시아는 분극체제로 규정지어진다. 중국은 남쪽은 4세기 부활한 晋(東晋)왕조가 420년까지 지속되었고 이후는 宋-齊(南齊)가 이어지고, 북쪽은 [五胡十六國]로 일컬어지는 短命의 外民族왕조가 이어지며 상호대립하는 南北朝시대를 맞이했다. 한반도에서는 낙랑·대방 2군이 소멸한 후, 고구려·백제 양국이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으며, 동남부에 신라가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열도에서는 이른바 倭 五王의 시대로서 畿內세력이 九州와 關東을 압도하였다. 중국이 남북으로 경쟁대립하고 있던 터라, 주변제국과의 사이에 복잡다기한 외교관계가 [官爵號]의 授與와 除正을 매개로 전개되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三國중에서 중국과 처음 관계를 가진 것은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五胡제국과의 관계는 오호제국이 단명한 관계로 오래가지 못하였다. 고로 중국왕조로부터 그다지 큰 압력을 받지 않고 남쪽으로 그 세력을 확대하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다. 남으로는 倭가 반도남부의 제국과의 관계속에서 한반도에서 군사활동을 펼치게 된다.
가야지역에서의 <연맹>은 바로 이러한 시기에 탄생하였다. 물론 <연맹>의 실태와 구조에 대해서는 금후, 지속적인 검토를 요하지만, 이러한 점에서 5세기는 이른 <연맹>의 형성기로서 중요한 시기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5세기 또 加羅=大加耶의 등장과 교통을 중심으로 문헌자료에 입각해서, 동아시아제국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가야를 시기별 혹 자료별로 조망해보고자 한다.

鮮卑金銀器硏究

소속 :
中國 北京大
발표자 :
齊東方
작성일
2001-06-04
비록 선비족들의 유적에 대한 確定과 部屬分類면에서 아직도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지만 현재 대개 인정하고 있는 拓跋과 慕容鮮卑의 유적과 유물에 의존하여 토론을 전개하면 새로운 발견이 있을 것이며 선비족들의 문화발전과정을 연구하는데에도 많은 시사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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