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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수.

작성일
2018-10-05 13:38:33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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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수

김택수

"체력과 과학" 한국 스포츠의 기틀을 다지다
한국 체육 발전의 밑거름 된 전 대한체육회장 김택수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세계무대에 오른 대한민국 선수들의 경기 성적에 온 국민이 기대를 걸었고,
"고국에 계신 국민 여러분 기뻐해주십시오!"라는 아나운서의 말 한마디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시대가 있었다.
대한민국체육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역사이며, 세계 속의 한국으로 우뚝 서는 성장의 기록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체육이 발전할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지만, 그중에서도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으로 88서울올림픽을 성사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김택수(1926~1983) 전 대한체육회 회장의 행보는 뚜렷했다.
김택수 회장은 김해에서 태어난 정치인이었고, 한국 체육계의 발전을 이끌어 낸 인물이다.

김택수 전 대한체육회장

김해군 명지면에서 태어나 경남고·서울대 법대 졸업
1961년 경남체육회장 시작으로 복싱연맹회장·대한체육회장 역임
한국인 4번째 IOC 위원 지내

대쪽같은 성품과 뜨거웠던 한국체육 사랑으로 우리나라 체육계의 발전을 이끌었던 김택수 전
대한체육회장.

김택수 회장은 김해군 명지면(1978년에 부산시 북구에 편입, 1983년에 강서구 관할 명지동이 됨)에서 태어났다. 경남고등학교(1회 졸업)와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했다. 민주공화당에 입당해 제6대·제7대·제10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경남고 시절 축구선수로 활동했던 김 회장은 1961년 경남체육회장을 맡으며 체육계와 인연을 맺게 된다. 평소 열렬한 복싱팬이기도 했던 김 회장은 1966년 대한아마추어복싱연맹회장 겸 국제아마추어복싱연맹 부회장을 맡았고, 1971년 11월 제24대 대한체육회 회장이 됐다. 이후 1979년 2월 퇴임할 때까지 삿포로동계올림픽(1972)·몬트리올올림픽(1976)과 테헤란아시아경기대회(1974)·방콕아시아경기대회(1976) 및 국내외의 각종 대회를 진두지휘하며 한국 스포츠 발전을 이끌었다. 1977년 제79차 프라하 IOC총회에서 한국인으로서는 4번째로 IOC 위원으로 선임됐다.

태릉선수촌 숙소·시설 현대화 소년체전 통해 유망주 조기발굴 선수연금제 도입 등 발전 교두보

우리나라 체육사에서는 1971년부터 1980년까지를 '한국체육의 발전기'로 본다. 김 회장이 재임기간 동안 했던 많은 일들이 한국 체육이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됐다. 한국 체육의 본산인 태릉선수촌의 급식을 영양식으로 바꾸고 숙소와 훈련시설을 현대화했다. '선 체력 후 기술'을 정착시켰고, 스포츠과학에 의한 경기력 향상 개념을 도입했다. 폭넓은 선수층 양성과 유망주의 조기발굴을 위해 전국소년체전을 처음으로 시도한 이도 김 회장이다. '경기력 향상 연구연금'(체육연금)도 김 회장이 사재를 내놓으며 창안했다. 이 연금제도는 선수들의 사기 진작과 스포츠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김택수 회장이 대한체육회를 이끌었던 시절 국민들에게 기쁨을 안겨 준 옛 일을 돌아보자. 1973년은 여자 탁구가 세계에 '스포츠 코리아'를 알린 해였다.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서 보여준 정현숙·이에리사 등의 선수들이 전해오는 소식은 전 국민을 감격하게 했다. 한국 여자 탁구가 세계 정상에 올랐던 이 대회 이후, 탁구는 전 국민에게 사랑받는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1976년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전 국민의 관심이 쏠려 있었다. 레슬링, 유도, 남녀배구, 복싱, 사격 부분의 선수 50명과 김택수 회장과 임원 22명이 선수단으로 구성되었다. 7월 3일 당시 서울시민회관 별관에서 선수단 결단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 회장은 "뮌헨대회 때는 회장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책임감이 덜 했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어떻게든지 좋은 성적을 내야 할 텐데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그 정도로 김 회장과 선수단의 심정은 각별했다.

대회 초반에는 메달 소식이 없어 초조했지만, 중반을 넘어서면서 기쁜 소식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에 출전한 양정모 선수의 금메달 소식은 그야말로 한반도 전체를 감격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수상 소식에 이은 한국체육사상 두 번째 금메달이며, 해방 이후 첫 금메달 소식이었다. 한국선수단은 양정모 선수의 금메달, 장은경(유도) 선수의 은메달, 전해섭(레슬링)·박영철(유도)·조재기(유도)·여자배구팀의 동메달 4개로 19위의 성적을 냈다.

김택수 회장과 선수들

김택수 회장은 '선 체력 후 기술'을 강조하며 선수들을 격려하고 아꼈다.

몬트리올올림픽은 한국 스포츠가 고난의 역사를 딛고 마침내 세계 속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올림픽 이후 선수연금제 도입 등 한국 스포츠가 웅비하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그러나 김 회장이 가장 좋아했고 또 큰 기대를 걸었던 복싱이 메달권에 들지 못해, 극심한 스트레스로 병원에 입원하는 일도 있었다.

1979년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는 김진호 선수가 샛별처럼 등장해 여자 개인전에서 우승하며 아시아 정상의 자리에 섰다. 이후 김진호 선수는 세계정상으로 올라서고, 많은 양궁 선수들이 세계를 주름잡게 된다.

김택수 회장에게 정치와 스포츠는 어떤 의미였을까. 1976년 1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스포츠는 정직합니다.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이기니까요. 정치는 달라요. 힘만 가지고 승패가 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정치는 괴물이랄 수 있습니다."

대한체육회를 이끌어가는 심정은 이렇게 표현했다. "정치란 것은 광채도 나고 영향력도 눈에 보이지만, 체육은 국가적으로 매우 필요한 부문이면서도 권력적 측면으로는 허약하기 이를 데 없지요. 모두들 체육회를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것 같아요."

김 회장은 국제대회에 참여한 선수들의 금메달을 기다리는 국민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며 이런 말도 했다. "금메달이 그렇게 어려운 것인 줄 몰랐어요. 물마시고 자란 사람이 우유 마시고 자란 사람을 죄다 꺾어 눌러야 하니 생각하면 아득한 느낌입니다."

1970년대 대한민국 체육사를 관통한 김 회장의 말을 들으면 격세지감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지나 온 그 시절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운 기억들도 함께 떠오른다.

1981년 9월 30일 늦은 밤 11시 30분. 독일 바덴바덴은 오후 3시45분이었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쎄울… 피프티 투(52표)! 나고야 트웬티 세븐(27표)"라고 외쳤다. 88올림픽이 서울로 확정되는 순간, 김택수 IOC 위원은 바덴바덴에서 목이 메어라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그토록 바라던 서울올림픽을 보지 못하고 1983년 7월 17일 새벽 신당동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다. 둘러앉은 가족들에게는 "의좋게 지내라"는 말을 남겼고, 운명하기 전까지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걱정했다.

김 회장의 대쪽 같은 성품과 뜨거웠던 한국체육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오늘도 우리는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는 눈부신 한국 스포츠 스타들을 만난다. 그들이 펄펄 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준 김택수 회장이 태어났던 김해에서도 세계적인 스타가 탄생하는 날이 곧 오지 않겠는가.

지인 배석현 씨의 장남
배홍법 씨가 전하는 김택수

국회의원 선거 때
상대편 수상한 몰표 불구
개표 계속하라고 해

배홍법 씨

배홍법 씨.

김택수 회장은 한일합섬을 창건한 김한수 회장의 동생이다. 김택수 김한수 형제와 의형제를 맺고 평생 신의를 지킨 배석현 씨가 있었다. 고 배석현 씨는 그들과 더불어 김해를 위해, 또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한 분이다. 배석현 씨의 장남 배홍법(60·부원동 가야조경)씨는 김택수· 김한수 씨의 옛 이야기를 선친에게 듣기도 하고, 어린 시절 보기도 했다.

배홍법 씨는 "제가 열 살 즈음일 때, 김택수 회장이 처음 김해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지요. 민주공화당으로 입당해 선거운동을 할 때, 동상동 우리 집의 아랫채를 선거본부로 사용했습니다. 그 정도로 가깝고, 네 것 내 것이 없는 사이였습니다"고 전해준다. 두 집안의 친교는 그 윗대부터 시작됐다. 배 씨의 할머니와 김 씨 형제의 어머니가 '형님 아우'하며 평생 친하게 지냈고 그 아들 대에 이르러서도 신의가 두터웠다.

배홍법 씨는 김택수 회장의 대범함과 인간미를 느끼게 하는 두 개의 일화를 전해주었다.

김 회장은 처음 출마한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졌다. "그 당시에 선거구의 한 지역에서 상대방 몰표가 쏟아져 참관인들의 의혹이 제기돼 개표를 중단하는 일이 있었죠. 그 때 김 회장은 오히려 투표를 한 지역민들이 결과를 기다리고 있으니 개표를 계속 하라고 말하는 대범함을 보였습니다."

김 회장과 배석현 씨가 지역 농민들을 대상으로 선거운동을 하러 다닐 때는, 새참을 같이 먹자는 권유에 그들의 형편을 생각해 처음에는 사양했다. 그러나 곧 생각을 바꾸어 다음부터는 논두렁에 함께 앉아 한 숟가락씩 밥을 먹으며 농민들의 이야기를 가까이 들었다. 그리고 '한 숟가락씩'이 계속 되어 배탈이 나기도 했단다.

배홍법 씨가 전해주는 이야기 속에서 김택수 회장, 김한수 회장, 배석현 씨는 아직도 살아 있는 듯 생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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