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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산 배전.

작성일
2018-10-05 13:39:23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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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산 배전

차산 배전

사군자 중심의 김해문인화맥을 만든 개조
차산 배전

시(詩)·서(書)·화(畵)는 문인예술의 중심이다. 시서화가 담긴 문인화는 동양미학의 원류이다. 문인화는 11세기 말경 중국 송나라에서 처음 시작됐다.
이후 명나라 말기의 문인이자 서화가인 동기창에 의해 양식이 정립됐다. 우리나라에는 청나라 때 유입됐으며, 추사 김정희를 통해 정착됐다.
한국 문인화는 동양회화의 큰 흐름과 함께하면서도 색다른 개성을 지닌 채 변화를 거듭해 왔다. 한국서화사에서는 영남의 문인화맥이 한 축을 이루고 있고, 영남 문인화맥에서는 김해의 문인화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김해의 문인화, 그 중심에 차산 배전(1843~1899)이 있다.

유림의 맥과 선비정신 확고히
추사 김정희 서화와 맥 닿아
한말 독립운동가·서예가·언론인
흥선대원군 문하 출입하기도

차산 배전의 작품 묵난

차산 배전의 작품 '묵난'.
배전의 자는 중견(仲見), 호는 차산(此山)·분성인(盆城人)·영혁자(泳赫子) 등이다. 차산은 김해의 여류 한문시인 지재당 강담운과의 인연을 간직하고 있는 호이다.
(본지 2012년 1월 18일자 10면 참조)

차산은 창녕 도천에서 김해로 이주한 분성 배씨 영혁(泳赫)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말에는 개화사상가로 활동했다.

김해서화사에서는 문인화맥의 개조(開祖:처음으로 시작하여 그 일파의 원조가 되는 사람)와 같은 존재로서, 후대에 미친 영향이 크다. 조선시대 때 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한국의 전통화단은 1900년을 전후해 호남화단, 영남화단, 평양화단 등 지방화단이 형성되는 변모를 보인다. 그중에서도 호남화단과 영남화단이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김해전통서화연구회 회원인 미술사학 박사 이나나 교수는 논문 '영남 문인화맥의 새로운 축, 김해의 문인화'에서 김해 문인화맥을 이렇게 설명한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영향으로 이어지는 석재 서병오(1862~1936)→긍석 김진만(1876~1933)→죽농 서동균(1902~1978) 계열의 대구·경북화단과 차산 배전→아석 김종대(1873~1949)·우죽 배병민(1876~1936)→수암 안병목(1906~1985)으로 이어지는 부산, 경남의 김해화단이 사군자화(四君子畵)를 본령으로 삼고 있어, 서울화단이나 호남화맥과는 다소 이질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차산이 김해 문인화맥의 1세대이며 개조로서 중요한 인물임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사군자를 중심으로 하는 영남화맥은 유림의 맥과 선비정신을 확고히 드러냈다. 그중에서도 차산을 중심으로 한 김해 문인화맥은 추사 김정희의 서화와 맥을 같이 한다. 문인화가 수부도시(한 도를 대표하는 으뜸도시)가 아닌 김해에 있었다는 것은 문인화를 연구하는 미술사학 관계자들을 놀라게 한다.

한말의 독립운동가·서예가·언론인으로 대한서화협회를 창립해 예술운동에 진력했던 위창 오세창(1864~1953)도 차산의 작품세계를 주목했다. 그는 '근역서화징'에서 "호는 차산. 헌종 11년 을사생. 김해에서 살았다. 산수와 절지(꽃가지나 나뭇가지만 그리고 뿌리는 그리지 않는 화법)를 잘 그렸다"고 기술하고 있다.

차산의 '묵죽도' '묵매도'에서는 강세황(조선 정조 때의 문신·서화가)의 맑고 담박한 묵기를 비롯해 추사, 이하응, 신위(조선말기 문인화가), 미불(중국 북송 때의 서화가)의 영향도 나타난다. 차산 글씨의 근원은 9대조 조부인 모정 배대유(裵大維. 1563~? 조선 중기의 문신)에 닿아있는 가학(家學)이다. 배대유는 남명 조식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물이다. 차산은 또한 동기창체와 추사체에도 능하였으며, 회화성이 강하고 자유분방한 필법을 보여주었다.

차산은 1870년대부터 '庚梅室(경매실)'이라는 서화실을 마련하고, 서울에서 10여 년 동안 문인이자 서화가로 활동했다. 차산의 친형 시재 배환(1833~1894)은 조선말 고종 때 선전관을 지냈으며, 흥선대원군과 시로써 교유했던 인물이다. 배환은 13세 때 김해 남문의 편액 글씨를 썼고 시문에 능해 흥선대원군과 시반(함께 시를 짓는 벗)으로 지냈는데, 차산은 형을 통해 흥선대원군 문하에 출입했다.

흥선대원군은 차산에게 시를 내리기도 했다. "김해의 裵此山(배차산)이 나날이 가까우니 / 늦은 봄 3월이면 그 사람 더욱 그립네. / 해마다 찾아오는 강남 제비처럼 / 나를 찾아 탈없이 오고 가네."

차산은 또한 대원군 주변 인물들과, 이후 개화당에 관계하는 '육교시사'(1870년대 후반에 시사(詩社), 위항문인(委巷文人) 모임. 위항문학은 조선 후기 양반사대부가 아닌 중인 이하 하급계층 중심으로 서울에서 전개한 한문학 활동)의 동인들과 교유했다.

육교시사를 이끌었던 강위(1820~1884)는 차산을 처음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山客(산객)이 서울에 오니 / 오직 한 자루 붓 뿐일세. / 가슴엔 푸른 호수의 달이 있고 / 눈빛은 떠오르는 해와 같네."

차산은 강위를 통해 추사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개화사상에 눈뜨게 되며, 불교와 기독교에도 해박한 지식을 쌓았다. 차산이 남긴 한문소설 '차산필담(此山筆談'과 박제경(조선말기 개화파 학자. 생몰 미상)의 '근세조선정감'에 차산이 남긴 평에서도, 차산의 학문의 깊이를 알 수 있다.

'차산필담'은 19세기 사회상을 볼 수 있는 작품집으로 당대 사회가 안고 있던 부조리와 모순을 확인할 수 있다. 근대소설이 나아갈 방향과 전망도 엿볼 수 있으며, 차산을 통해 당대 지식인의 시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큰 의의가 있는 저술이다.

차산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일어나면서 김해에 칩거한 것으로 보인다. 차산은 김해에서 시서화로 후학들을 키웠다. 외종손인 아석 김종대와 직제자인 우죽 배병민이 대표적인 후학이다. 아석은 수암 안병목, 청사 안광석과 육천 안붕언에게 영향을 주었다. 우죽 배병민은 한국서예협회의 창립자이며, 예술원 회원인 시암 배길기의 청년시절에 서예를 가르쳤다. 또한 아석의 제자인 수암 안병목은 운정 류필현과 한산당 화엄선사에게 영향을 주었다. 김해 문인화맥은 추사 이래로 흥선대원군, 차산으로 이어지는 한국 문인화의 전형을 그대로 유지하며 그 명맥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김해문인화의 장을 열었고 후학을 길렀던 차산은 1899년 2월 26일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서화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김해문인화 연구의 싹이 트고 있는 지금, 그 어느 지역보다 김해에서 차산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김해전통서화연구회가 말하는 차산
차산은 스스로를 '시인'이라 불리기를 원해

김해전통서화연구회는 김해를 중심으로 40~50대의 회원들이 모여 김해문인화를 십 수년째 공부하고 있는 모임이다. 회장 김현대(48) 씨는 "김해문인화의 개조인 차산은 '시인'이라고 불리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시서화에 모두 능했던 차산은 다방면에 재능이 많았으며, 추사 이후 글씨로 유명했던 인물이었다. "글씨와 문인화는 기본적으로 학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김현대 씨는 남명 조식, 퇴계 이황, 고산 황기로(조선시대 16세기를 대표하는 초서의 대가), 모정 배대유의 학맥이 차산에게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김해전통서화연구회의 연구와 작품 수집은 관련 학문 연구자들에게는 소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김해문화의전당과 김해전통서화연구회 주최로 윤슬미술관에서 지난해 12월 7일부터 20일까지 '김해를 빛낸 예술가 시리즈 V- 김해전통서화의 맥, 차산에서 한산당까지'를 개최한 바 있다. 문인화는 멀고 낯선 양식의 예술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우수한 전통문화예술이며, 앞으로 계승 발전시켜야 할 소중한 문화자산이다. 김해전통서화연구회는 "김해에 이런 훌륭한 문인화가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김해시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자랑스러워하기 바란다. 김해와 부산 경남지역의 새로운 문화자원으로 자리매김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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