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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면적 : 44.83평방키로미터(전2.5, 답14.23, 임야23.0, 기타5.1) 시전체의9.6
  • 행정구역 : 10개리 35개마을 35개반

연혁

  • 서기42년 가락국 수로왕이 왕자를 진례 성주에 봉하였으며, 통일 신라말기에 김인광(金仁匡)이 진례성 제군사가 되어 이곳을 지켰다고 한다.
  • 고서에 의하면 조선 예종 때의 “경상도지리지”(1469년) 부서 진례촌(府西 進禮村)으로 기록되어 있다.
  • 당시 청천면으로서 속칭 청내라 하였으며 이는 열두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청천리에 모여 북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열두 청내라 불렀다.
  • 1894년 갑오경장때에는 청천,시례,송정,초전,신안을 중심으로 진례면,산본리,신월,송현,담안,고모,고령,관동,성법,개동을 중심으로 하여 율리면으로 나누어 졌으나, 1914년진영의 의전리와 죽곡리 일부를 흡수하여 진례면이 되었다.
  • 그후(1942년) 진영면이 읍으로 승격하기위해 죽곡리와 의전리를 진영으로 편입되었다.
1969년 진례면사무소 1969년 진례면사무소
1988년 진례면 신청사 준공식 축하행사 1988년 진례면 신청사 준공식 축하행사
진례면민단합대회 진례면민단합대회

우리마을의 특징

  • 부산,창원사이에 위치하여 지리적 요충지로써 지역개발 수요 급증
  • 전통도예 발달(100여개 업체)  : 매년 "분청도자기 축제" 개최
  • 대도시 배후지역으로 산업단지와 명품 주거지역으로 발전 기대

지명유래

전 설

  • 외톨바위
    • 신안마을 앞산 중턱에 있는 집채만한 큰 바위로 전설에 의하면 선녀들이 형제 정하기 공기돌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선녀들의 손바닥에서 노는 공기 돌은 외톨바위 만큼 큰 돌이었다.백번만 먼저올리면 언니가 되는데 한 선녀가 99번째 돌을 올릴 때 옥황상제께서 부르신다고 하므로 당황한 선녀는 100번째의 공기 돌을 마음이 조급해서 실수로 떨어 뜨렸는데,그것이 이곳에 떨어져 외톨 바위가 되었다고 전함.(한국의 전설집에 수록 되어 있음)
  • 탑 골
    • 고모마을 입구에 작은 돌로 쌓은 돌탑이 있는데, 하나는 허물어지고 한 곳에만 남아 있다. 옛날 고모마을에 사내아이가 출생할 때 산모의 배를 뚫고 출생하니 산모는 죽고 사내아이는 수일만에 장대한 큰아이로 자라 마을을 떠나고, 마을사람들은 산모의 비참한 죽음과 아이가 역적이라도 되면 마을에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지나가는 도사에게 이 사정을 애도하니 마을 이곳에 자그마한 돌탑을 쌓으면 좋을 것이라 하여 돌탑을 세웠는데, 그후로는 그러한 일이 없었다고 함.
  • 탁발승의 수난
    • 송정리 송정마을은 청주송씨의 집성촌인데, 청주송씨에게 앙심을 품은 중이 송정의 송씨를 망(亡)하게 할 생각으로 해박한 풍수설로 마을 어른들을 설득하기를 앞산 백학권익형(白鶴卷翼形)의 명당에 쓰인 산소를 아래 쪽으로 옮기고 학의 머리에 해당되는 조그마한 앞산 둑뫼의 양쪽에 못을 팠으나 그 이후로 송정이 크게 쇠퇴하였으므로 뒤늦게 중에게 속은줄 알고, 탁발승이 마을에 오면 코를 끼여 나무에 달아 메는 고초를 당하였으며,일제시대 까지 탁발승을 수난 하였다고 함.

황새봉

  • 진례면 상우뒷산으로 높이는 313m이다
  • 엣날 진례 천지가 온통 물에 잠겼을 때 황새 한 마리가 앉을 곳을 찾아 헤매다가 앉은 곳이 황새봉 정상으로 그 후로 산 이름이 황새봉으로 불리운다

대암산

  • 평지 뒤에 있는 산으로 창원시 대방동과 경계를 이루며 높이는 659m이다
  • 일제 말기에 일본군은 대암산에 항공감시 초소를 설치하여 미공군 공습을 감시하던 곳으로 공습을 감시하던 병사들이 창원이나 진례로 수시로 놀러가 밤을 지내고 올라가고는 하다가, 어느날 하루는 여자들 집에 놀러 갔던날 밤 미 공군기가 진해를 공습하여 초소병들은 모두 전방으로 좌천당한 웃지못 할 일화가 있는 곳이다

비음산

  • 평지뒤애 위치하며 창원시와 경계가 나누어 지는 곳으로 높이는 650m 이다
  • 산 이쪽에서 말을 하면 소리가 날아(飛) 고개넘어 저쪽에서 들렸다하여 날음산이라고도 한다

도재산

  • 청천리 뒷산으로 진영읍과 경계에 있으며 높이는 285m 이다
  • 중턱에 있는 함박등은 겨울에도 함박꽃이 핀는 명산이라 하여 함박산이라고도 하고 산이 함지박 처럼 생겼다고 함박산이라고도 한다

역 사

  • 선사시대 우리고장은 신석기 시대부터 선인들이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초기 수렵과 어로 생활에서 청동기 시대(BC 2세기)부터 농경문화가 시작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가락국 시대(서기 42년-532년)에는 우리 지역에서 가야 토기 파편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어 완전한 촌락을 형성하고 쌀 농사 위주의 생활을 영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수로왕이 왕자를 진례 성주로 봉하여 토성과 첨성대까지 쌓았다는 읍지의 기록도 있다. (현 산월마을 남쪽) 우리 김해 지역은 가야 때부터 왜구의 침입이 많았으며, 특히 임진왜란(1592-1598)때는 왜병이 처음 김해성을 함락하고 주촌면 천곡에서 지금의 시례 뒷고개로 이동 북상한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왜병의 점령하에 있었다. 1919년3월 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무렵 우리 고장에서도 담안리 송세탁(宋世卓), 송세희(宋世禧), 송상진(宋相振)등의 조선 독립을 위해 줄기차게 항쟁 하였다.

충 신

  • 송담서원에 향사된 송빈(宋賓)
    • 청주인으로 임진왜란때 백의 창의하여 성의 함락과 동시 순절하여 송담서원에 향사 되었음.

효 자

  • 반석철(潘碩澈)
    • 기성인으로 세조때 승의랑 장흥고 주부를 지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6년 시묘에 저녁마다 호랑이가 곁에 지켰으며, 효자에 얽힌 많은 전설이 지금도 전해 오며 성종 원년(1470년)에 정려와 복호의 은전이 내려 정려는 현재 지방도변에서 훼철되고 2002.3.23일 시례리 하촌마을 입구에 이건하였음.
  • 조처녀
    • 효자 반석철의 외손으로 창녕인 조문한의 딸이며,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길쌈을 짜 고기와 술을 사서 부모를 지성으로 섬겼으며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 허벅지의 살을 베어 약과 함께 달여 드려 어머니가 소생케 하는 등 지극한 효성으로 정묘년에 정려 되었음.정려는 반효자 곁에 있음. 그 외 김두암 등이 있다.

유적

  • 진례성(進禮城)
    • 비음령의 북쪽 진례 평지와 창원 토월동에 걸쳐 계곡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토성으로 가락국의 초기에 축성된 옛성으로 현재 동서간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 토 성(土城)
    • 가락국의 수로왕이 왕자를 진례성주로 봉하고 왕궁을 지었는데,지금의 송정리 산월마을 일부와 신안리 신안마을의 일부인 토성마을 일대를 흙으로 성을 쌓았다고 하여 지금도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다.
  • 첨성대(瞻星臺)
    • 가락국 수로왕이 토성마을 위 첨성산의 상봉에 천문을 보기 위하여 쌓았다고 전하여 지금도 별을 보는 곳으로 비비당이라 부르며, 토석을 쌓은 흔적이 남아 있음. 현재 경주 첨성대 보다 약 600년 앞서 축조된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 송담서원지(松潭書院址)
    • 임란 충신인 송빈,이대형,김득기,세분을 향사하기 위하여 신안마을의 무송에 숙종 42년(1716년)에 송담서원을 창건하고,순조원년(1801SUIS)에 훼철 되었다가 24년(1824년)에 복설 되고 고종 5년(1868년)국금으로 훼철되어 지금은 빈터만 남아 있음.
  • 삼충대(三忠臺)
    • 고종 5년에 송담서원이 훼철되자 건양원년(1896년)에 후손들이 송담서원 삼충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경치 좋은 세심포의 암벽 바위 위에 단갈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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