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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한림면은 가락국의 수도인 옛 김해부 북쪽의 한 고을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 후기부터 하북면으로 명명되어 왔었고, 그 이후 조선시대 말 1896년에 상북면(上北面)과 하북면(下北面)으로 분리되었으나, 1914년 다시 병합하여 이북면(二北面)이 되었다. 이북면은 북쪽에 위치한 두개의 면이 합하였다고 부쳐진 이름인데 이북이란 발음이 자연스럽지 못하여 1987년에 한림면(翰林面)으로 개칭하여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림이란 명칭은 중심마을인 한림정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는 조선 초 문신인 김계희(金係熙)가 단종이 쫓겨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화포천변 한적한 곳에 정자를 짓고 한림정(翰林亭)이라 부른데서 유래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림면은 김해시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동쪽으로 낙동강을 경계로 밀양시 하남면, 동쪽으로 생림면(生林面), 북부동(北部洞), 서쪽으로 진영읍(進永邑)과 창원시 대산면(大山面), 남쪽으로 주촌면(酒村面), 진례면(進禮面)과 접하고 있으며, 면적 59.49㎢, 12개 리 47개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 면계에 봉화산이 동서로 뻗어 있을 뿐 면의 대부분이 낙동강의 하안평야이다. 넓은 평야 및 중산간지역으로 생활기반이 주로 농, 축산업으로 이루어지며, 경전선 철도, 국도14호선 및 국지도 60호선과 부산순환 고속도로 건설로 기업체 입지여건이 양호하다.

연혁

  • 1909 --- 화포천 경계 북쪽은 상북면, 남쪽은 하북면
  • 1914 --- 이북면 개칭 11개리 32개 마을
  • 1964 --- 이북면 장방리 한림마을 1,2,3구 분동
  • 1968 --- 이북면 장방리 333-5번지 면청사 신축 이전
  • 1982 --- 이북면 시산리 시호 1,2구 분동
  • 1983 --- 생림면 6개마을 편입
  • 1987 --- 이북면을 한림면으로 면명 개칭
  • 2005 --- 한림면 한림1구 청원마을 분동, 한림3구 신봉마을 분동
  • 2009 --- 한림면 신천리 망천마을 1,2,3구 분동
  • 2017 --- 한림면 명동리 인현마을 금음마을 분동
  • 2018년 --- 한림면 행정복지센터 신청사 개청
1969년 한림면사무소 1969년 한림면사무소
1982년 한림면 시가지 모습 1982년 한림면 시가지 모습
한림면 행정복지센터 신청사 한림면 행정복지센터 신청사

우리마을의 특징

  • 경전선 철도 및 국도 14호선이 통과하여 공업입지 조건에 적합함
  • 낙동강 하류 저지대로 화포천 유역 수해가 잦음
  • 넓은 평야와 중산간지역으로 구성되어 생활기반이 주로 농업과 축산업으로 이루어짐

지명유래

한림정(翰林亭)

한림 학사 김계희가 살았기 때문에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1905년 10월 마산선 철도 (현재 경전선)가 개통되고 이곳에 역을 두어 일본인들이 유림정으로 고쳤으나 해방후 역명을 다시 한림정으로 고쳤다.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중학교, 초등학교가 이곳 면소재지에 있으며, 1983년 소도읍가꾸기가 완공되고 1984년 상수도가 시설되었다. 동북쪽에 상진교, 동남쪽에 화진교가 있다.

장방리(長方里)

장방리는 옛 상북면(上北面)으로 행정마을은 면소재지인 한림정(翰林亭)마을의 1,2,3구와 장방(長方), 진말(鎭末), 부평(富坪), 대항(大項)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신천리(新泉里)

신천이란 지명은 신천초등학교 아래쪽에 맑고 깨끗하며 물맛이 좋은 풍부한 수량의 우물이 있어 부르게 되었다.

명동리(明洞里)

봉황(鳳凰)이 살았단느 서봉산이 있으며 봉황이 운다고 명동(鳴洞)이라 불렀는데 뒤에 울명(鳴)이 밝을명(明)으로 되어 명동(明洞)이 되었다.

용덕리(龍德里)

용덕리는 옛 하북면으로 신천리의 크고 작은 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천(川)이 용(龍)처럼 생겼는데 그 천을 끼고 생겨난 마을이란 뜻이다.

안하리(安下里)

안하리는 홍수때마다 물이들어와 안명(安明)이란 이름이 지어졌고 후에 안하(安河)로 변하고 다시 안하(安下)가 되었다,

가동리(佳洞里)

가동이란 지명은 낙동강변의 물속에 떠있는 독뫼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낙동강 제방을 쌓기전 가동 일대는 낙동강변의 유수지였으며 홍수시 독뫼를 제외한 주위는 물바다였다. 그리하여 그 독뫼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아름다울 가(佳)를 써 가동(佳洞)라 부르게 되었다.

금곡리(金谷里)

금곡리는 고려때부터 옛교통로로서 금곡역(金谷驛)이 있었다

가산리(佳山里)

가산이란 지명도 낙동강변에 만들어진 작은 독뫼의 모습이 아름다워 붙여진 이름이다.

시산리(匙山里)

시산이란 이름은 낙동가 제방을 쌓기전 낙동강 변에 자리 잡은 산이 숟가락 모양처럼 생겼다하여 술뫼라 부렀는데 술은 순수한 우리말로 숟가락이며 뫼는 산이다. 독특하고 아름다운 우리말이지만 한자가 들어와 匙(숟가락 시) 山(뫼산)이 되었다.

안곡리(安谷里)

골짜기 안쪽에 위치했다는 뜻에서 안곡리라 부르게 되었다.

퇴래리(退來里)

퇴래리의 지명은 신의와 지조로 살아간 충신의 삶에서 생겨났다.
단종 3년(서기1445년)에 서강(西岡) 김계금이 벼슬을 버리고 이 곳에 내려와 살았고
참판 김계희의 호도 퇴은이며 인조와 효종 때 회령부사를 지낸 김영준도 최관후 이곳에 살면서 퇴래촌(退來村)이라 했다하여 퇴래가 되었다.

병동리(屛洞里)

병동리(屛洞里)란 이름은 왕이 병풍을 하사 하였기 때문에 생긴 이름으로 어병동(御屛洞)이었다. 하북면이 상북면과 합쳐 이북면이 되면서 모업(모갈),범곡,가달마을을 합치면서 병동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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