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김해 펼침

투데이김해

2024년 05월 06일(월) 오전 03시 20분

날씨

비
  • 온도 11℃
  • 습도 :0%
  • 강수확률 60%
  • 좋음미세먼지 10 ㎍/㎥
  • 좋음초미세먼지 3 ㎍/㎥
  • 보통오존농도 0.043 ppm
김해시 인구 (2024년 4월말 기준)
555,695

오늘의 행사

  1. 오늘의 행사가 없습니다.

오늘의 소식

  • 오늘의 소식이 없습니다.
투데이김해 닫기
수산물 방사능 안전정보 본문상단으로 이동

성재 허전.

작성일
2018-10-05 13:45:42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
1701
  • 성재허전.jpg(14.2 KB)

성재 허전

성재 허전

고종이 친필 내려 "김해 선비들에겐 스승, 백성들에겐 어진 수령"
남명 학풍 진작시킨 김해도호부사 성재 허전

목민관. 백성을 다스려 기르는 벼슬아치라는 뜻으로, 고을의 원(員)이나 수령 등의 외직 문관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한 지역을 다스리는 이가 얼마나 중요한 지는 두 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성재 허전(1797~1886)은 3년여 김해도호부사를 제수받아 김해에 머물렀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지역 인재를 양성하며 선정을 펼쳤다. 성재는 김해사람은 아니지만, 김해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다. 성재는 김해에서 남명 조식의 사상을 따르는 '강우학풍(江右學風:강우학파는 낙동강 오른쪽에 자리한 문하라는 뜻이다. 퇴계 이황의 문하는 강좌학파라 한다)'을 크게 진작시켰다. 김해향교 옆에 성재의 덕을 기리는 '취정재(就正齋)'가 있다.

성재 허전을 기리는 취정재

구순 일생을 산 성재 허전의 삶에서, 김해부사로 지낸 3년은 짧은 시간이었으나, 인재양성 등으로 김해에 많은 영향을 미친 기간이었다. 성재 허전을 기리는 취정재는 김해향교 옆에 있다.
박정훈 객원기자 punglyu@hanmail.net

1797년 현재 경기 포천서 출생
4세 이전 부친께 효경 배우고 황덕길 배움 받아 성호 학풍 전수
39세때 급제 후 68세때 김해 부임

성재 허전의 자는 이로(而老),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본관은 양천으로 1797년(정조 21년)에 포천현 본동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바탕이 영특하고 성격이 호방하고 인품이 뛰어났다. 만 4세가 되지 않아 아버지 일천공 허형에게서 효경을 배웠다. 성재는 효경을 배운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이런 기록을 남겼다.

"이 효경은 우리 증고조께서 내 부친께 명령해 손수 책을 베껴 쓰게 하시어 나를 가르치게 한 것이다. 그 책 끝에 '신유하서(辛酉夏書)'라고 적혀 있는 것은 내가 만 4세가 되지 않는 나이였다. 내가 다행히 큰 잘못이 없었던 것은 실로 이 경전이 배움의 첫 길이었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자손을 가르침에는 반드시 이 책을 먼저 읽히기로 영원히 가법(家法)으로 정한다."

성재는 부친의 명에 따라 황덕길의 배움을 받았다. 성호 이익-순암 안정복-하려 황덕길로 이어지는 '근기남인계'의 학풍(성호 이익을 따르는 기호지방 남인들의 실학적 학풍)은 성재에게로 전수됐다.

성재는 1835년 39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김해도호부사로 임명된 건 68세인 1864년이다. 김해에 부임한 성재는 백성들을 잘 보살피고, 관리들을 결속시키며, 법에 따라 다스릴 것을 천명했다. 그 뜻을 담은 것이 '회유문(回諭文)'이다.

"나는 진실로 우리 선비와 백성들이 정도에 전념하고 본업에 뜻을 두길 바란다. 사지를 게을리 하지 않고 천시를 잃지 않고 지리를 버려두지 않으며 노인들을 업신여기지 말고 외로운 사람들을 고독하게 버려두지 말고 윷이나 도박을 하지 않으며 사납게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말고 이치에 맞지 않는 소송을 하지 말며 술에 취해 주정하지 말고 재물에 때묻지 말라. 이 중에서 한 가지라도 어기면 집안의 패륜아요 국가의 난민이다." 성재가 150여 년 전 지은 글이지만, 백성을 다스리는 이치는 오늘날의 현실과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한다.

성재는 김해부사로 있는 동안 항상 의관을 정제하고 사무를 보았다. 그 단정함이 한결같아 백성들을 만날 때도 평상복으로 만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80세 이상 된 노인들을 위문하여 쌀과 고기를 내림으로써, 백성을 보살피고 민심을 평안하게 다스렸다. 수로왕릉을 배알하며 옛 역사를 보존하는 일에도 마음을 썼다.

신산서원 참배하며 유학 진흥 혼신 명륜당서 지역 유생들과 강학 즐겨
1866년엔 신산서원 원장 돼 김해 머문 3년간 문하생 모여들어

유학자인 성재는 관내에 있던 '신산서원(산해정)' 등을 참배하며 유학 진흥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향약을 새롭게 하여 향교 벽에 게시하고, 약장(約長·향약의 우두머리)을 뽑아 매월 조문을 읽었다. 부임하던 해 가을에는 지역의 유생들을 모아 향교에서 '향음주례'를 시행했다. 향음주례는 조선시대 향촌의 선비와 유생들이 향교나 서원에 모여 예로써 주연을 함께 즐기는 향촌의례이다. 그 고을 관아의 수령이 주인이 되고, 학덕과 연륜이 높은 이를 큰 손님으로 모시고, 그 밖의 유생들도 손님으로 초대해 이루어졌다. 주인과 손님 사이의 예절바른 주연을 통하여 연장자를 존중하고 유덕자(덕이 있는 사람)를 높이며, 예법과 같은 풍속을 일으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인근의 많은 유생들이 모여 들었는데, 이를 계기로 성재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이들과 함께 명륜당에 모여 강학을 하였다,

이듬해 봄, 성재는 자신이 거처하던 공여당(公餘堂)을 개방하여 인근의 학자들을 맞이했다. 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성재의 배움을 청한 이가 1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1866년 2월에는 신산서원의 원장이 되어 남명이 학문을 수양했던 산해정을 찾아 문도들과 강학을 했다. 4월에는 휴가를 얻어 경상도 내 여러 사당과 서원을 방문했다. 성재가 이르는 곳마다 그의 학문을 흠모하는 50~60명의 문도들이 모여 강학을 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성재가 김해에 있던 3년간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많은 선비들이 그의 문하에 모여들었다. 성재는 지역 인재를 양성하여 강우지역의 학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특별연구원 강동욱 씨는 논문 '성재 허전의 강우지역 문인 고찰'에서 "강우지역 성재 문인들은 진주 산청을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서부경남 지역과 김해 밀양 함안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 경남지역에 밀집되어 있는데, 모두 남명학맥이 강하게 형성되었던 지역이다"라고 설명한다. 대눌 노상익과 소눌 노상직(김해뉴스 2011년 12월 21일자, 28일자 '김해인물열전'참조) 등 지역의 학자들은 성재의 학문을 계승해 각 지역의 학풍을 진작시켰다. 그의 문하에 출입했던 많은 선비들이 이후 강우학파의 주도적 세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학문을 중시했던 활동으로 인해 훗날 성재는 곤경에 빠지기도 했다. 1867년, 공무중 여가에 강학을 했다 하여 '위학(성리학파가 다른 학파를 비평하여 일컫는 말)'으로 지목받아 의금부의 조사를 받았다. 이때 강우지역의 문인들이 상소를 올려 일이 무난히 마무리되었다.

성재는 김해부사로 재직하면서 아전들이 민생을 해칠까 염려하여 추호도 사사로운 마음을 가지지 못하도록 했다. 또한 백성들에게도 바른 도리를 마음에 두고 본업을 열심히 하여 옳지 못한 일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했다.

성재의 선정은 조정에도 보고됐다. 당시 고종은 성재에게 친히 글을 내렸다. "경이 김해부에 부임함으로부터 선비들은 스승을 얻은 자랑이 있었고, 이제 성적을 보니 백성들은 유임을 간절히 원하니 진실로 옛날의 어진 수령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김해의 지역 선비들과 백성들은 성재의 유임을 바랐다. 그러나 3년 임기를 채윤 성재는 곧바로 부호군에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갔다. 강동욱 연구원은 "성재가 김해를 떠날 때에 수백 명의 백성들과 유생들이 전송을 했고, 일부 제자들은 스승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기도 했다. 그 중 일부는 서울에 계속 머물며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며 성재를 흠모하고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고 설명한다.

1878년 수로왕릉에 전호 내리고
능관 둘 것 상소해 숭선전 사액

김해를 떠났어도 성재는 김해를 잊지 않았다. 1878년 대호군의 직책으로 수로왕릉에 소작농을 둔 토지를 내리고 능관을 둘 것을 상소했다.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여 수로왕릉의 침전(임금의 침방(寢房)이 있는 전각)을 개축하여 '숭선전'이라 사액(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는 일)하고, 능참봉을 두어 김 씨와 허 씨들이 번갈아 소임을 맡게 했다.

성재는 90세 되던 해인 1886년 9월 23일 일생을 마쳤다. 고종은 조회를 그치고 시장을 철시토록 명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1888년에는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성재의 문하생을 기록한 '냉천급문록'에 등재된 문하생 수만 해도 5백여 명이 넘는데, 이중 70%가 강우지역 문하생이다. 등재되지 않은 문하생을 발굴하는 일은 지금도 연구되고 있다. 1927년 김해의 후학들은 취정재를 건립하고 위패를 모신 금릉영각을 세워 김해 백성들에게 끼친 공을 기리고 있다.

성재 허전을 기리는 취정재와 철명편목판
1927년 김해향교 옆에 취정재 건립하고 금릉영각 세워

목판 경남도문화재자료 지정 보관

성재 허전 선생의 1878년 7월 초사흘자 편지 성재 허전 선생의 1878년 7월 초사흘자 편지. 상중에 있는 먼 친척 제자에게 안부를 묻고 수로왕릉 전호에 대해 소를 올려 고종의 비답을 받은 내용 등이 적혀 있다.
철명편목판 성재의 저서 '철명편'을 인쇄한 '철명편목판'

취정재는 대성동 248번지에 위치해 있다. 김해향교 옆이다. 취정재에는 성재의 저서인 '철명편'을 인쇄한 '철명편목판'을 소장되어 있다. 철명편은 중국 고대의 삼왕(하나라의 우왕, 은나라의 탕왕, 주나라의 문왕)에서 우리나라 역대 제왕에 이르기까지의 사적을 기록한 책이다. 1890년 조판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잦은 인쇄로 마구리가 떨어져 나가고 목판만 남아 있다. 철명편목판은 1990년 12월 30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74호로 지정되었다. 목판은 57장으로 30.3×19.2㎝의 크기이다.

성균관유도회김해지부 공기옥 회장은 김해 지역 유림들이 정성을 다해 성재 허전을 기리고 있다고 말했다. "성재 허전 선생은 학자로서 높은 분이고 김해 부사로도 큰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김해를 비롯해 경상남도의 각 서원에 상량문과 기문도 남겼습니다. 지역 인재 양성에 매우 힘쓴 것은 큰 치적입니다. 김해향교에서는 지역유림들이 지극정성을 다해 매년 음력 9월 9일 향례를 모시고 있습니다."


페이지담당 :
문화예술과 문화팀
전화번호 :
055-330-3211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