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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진수.

작성일
2018-10-05 13:27:13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
3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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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진수

변진수

여성의 인권과 문화·복지를 위해 불꽃 같은 정열을 바치다
김해여성복지회관 건립 지역 여성운동의 뿌리 변 진 수

김해시 봉황동 25-9번지에 김해여성복지회관이 있다. 김해의 여성들이 힘을 모아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民立) 여성회관이며, 전국에서 유일하게 여성이 지은 여성회관이다. 그 중심에는 고 변진수(1925~2006) 선생이 있다.
변진수 선생은 김해와 여성을 위해 일생을 헌신과 봉사로 살다 가신 분이다. 김해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여성계의 정신적 지주였던 선생의 아름답고 치열한 삶을 돌아본다.

수주 변영로 시인의 장녀로 태어나 결혼하며 서울서 김해로 새로운 삶
며느리·주부로서의 자신의 삶 반추

변진수 선생은 시 '논개'로 유명한 수주 변영로 시인의 장녀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수주는 일제를 위한 글 한 줄 쓰지 않았고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절개를 지키던 민족시인이다. 그의 명망은 높았으나, 가족들은 지독한 가난과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가난 속에서도 배화고녀를 졸업한 변 선생은 경기도 계양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교사생활을 하던 중 1944년 3월 김해로 시집을 왔다. 시댁은 김해 가락면 봉림리(현재 부산 강서구 봉림동)에 살던 남평 문씨 집안이었다. 부군인 문익상은 당시 서울대 의대 학생이었다.

'서울 아가씨' 변진수는 김해 시댁으로 신행 온 지 일주일 만에 공부하는 남편을 서울로 보내고, 농사일을 거드는 '김해 아지매'로 살아야 했다. 익숙하지 못한 경상도 사투리에 적응하고, 낯선 농사일을 해내며 상일꾼으로 사는 동안 남편은 의대와 군의관 복무을 마치고 돌아왔다. 남편이 김해 최초로 병원을 개업하면서, 선생은 30대 중반에 비로소 살림을 났다.

바쁜 농사일에서 헤어나 여유가 생긴 변 선생을 찾아온 것은 자신에 대한 고민이었다. 선생은 이 당시에 "나는 무엇인가? 도대체 무엇에 쓰이려고 태어난 사람인가?"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남편에 비해 시대에 뒤떨어진 여성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낀 선생은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1968년 3월 '대한적십자사 부산경남지사 김해부녀봉사회'를 창립했다. 봉사회의 회장을 맡으면서 제2의 인생이 펼쳐진 것이다.

1968년 김해부녀봉사회 창립 1975년 부녀상담소 설치
1982년 국내 최초 민립 여성회관 세워 "죽는 날까지 김해여성 위해 일할 것"

"어머니가 계속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것을 바깥으로 나타내어 활동을 시작한 계기가 이 일이 아니었나 기억됩니다." 변진수 선생의 장남 문병조(67·경기도 분당) 씨의 회상이다. "어머니는 평생 일기를 쓰셨습니다. 철두철미한 성격이셨고, 한번 뜻을 세우면 끝까지 이루어 내셨지요. 언행이 일치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김해에서 어머니가 이루어낸 일들도 어머니의 강인한 의지, 그리고 김해의 많은 여성들이 마음을 보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문병조 씨는 "어머니는 평소에 늘 '죽고 나면 썩어 없어질 몸, 살아 있을 때 써야 한다'며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을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일을 하는 매순간 선생은 그 일의 의미를 생각하셨던 것 같다. 선생이 남긴 산문 '쪽보'는 그 마음을 엿보게 한다.

"나는 삼베나 안동포 조각으로 쪽보를 만들면서 이 옷감을 짠 직녀들을 생각한다. 이 땅에 심어 키운 삼나무를 베어다가 삶아 손으로 껍질을 벗기고 갈라서 실을 내어 베틀에 앉아 이 베를 짰으리라. 그런 공력이 든 천을 한 조각도 버리기가 아까워 옷을 재단하고 남은 조각들을 모아 두었다가 조각보를 만드는 기쁨도 작지는 않다. 조각보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 몇 조각씩, 일 년 열두 달 짜투리 틈이 날 때마다 이어서 만든다.(중략) 어쩌면 인생도 이 쪽보처럼 시간과 만남과 경험의 조각을 이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조각 한 조각이 모여지고 이어져서 여름날 밥상을 시원하게 덮어주는 번듯한 상보가 되듯 여자인 나에게 주어진 조각시간을 헛되이 버리지 않고 이어서 조각보를 완성하듯 끈기 있고 겸허하게 내 70평생의 역사를 만들려 노력했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변진수 선생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여성 인권·복지·문화의 불모지인 김해에서 여권신장운동과 가난퇴치, 자원봉사, 장학사업 등으로 김해여성들을 깨우쳐나갔다. 1975년에는 부녀상담소도 설치했다. 선생을 중심으로 깨어 있던 몇 여성들은 여성들의 쉼터와 평등사회의 터전을 만들고자 70년대 중반부터 계를 부었다. 또 25명의 여성들이 몇 년 동안 회관 건립을 위한 새마을적금도 들었다.

변진수 선생은 당시의 마음을 "우리들이 활동할 수 있는 장소가 생긴다면 여성단체들의 월례회도, 활동할 수 있는 공간도, 안노인들의 휴식처도, 여성교육을 위한 강좌도, 취미교실도, 직업 알선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흥분되었다"고 회고하는 글을 남겼다.

뜻을 같이 한 여성들이 먼저 돈을 냈다. 여성들의 공간이 생긴다는 희망으로 김해여성들은 젊은이에서 할머니까지, 각 리와 동의 부녀회들도 나서 모금을 하며 회관건립에 힘을 보탰다.

그리고 처음 뜻을 세운 지 10년이 지난 1982년 5월 26일 김해여성복지회관이 준공되었다. 준공식날 식사에서 선생은 "이 생명 다하는 그날까지 김해여성을 위하는 일이라면 신명을 바치겠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회관 건립 후에는 운영하고 발전시키는 어려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은 후원단체인 여성복지회를 조직하고, 회원들과 함께 많은 일을 했다. 어버이날이면 무궁화꽃을 만들어 팔고, 수예품·서예품·홈패션·음식을 만들어 바자회를 열며 수익사업도 부지런히 했다. 이렇게 모인 기금으로 김해의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장학금도 전달하고 회관도 운영했다. 여성대학을 운영하며 김해여성들의 정신을 살아있게 하는 일도 시작했다.

현재 복지회관을 이끌어가는 장정임 관장은 여성대학 일로 변진수 선생과 인연을 맺었다. "여성운동을 하는 수많은 활동가를 만나 보았지만, 여태껏 변진수 선생님만큼 올바르고, 심지 굳고, 곧은 분은 없었습니다. 누구라도 진실하고 성실하게 대했고 존중하셨습니다"라며 고인을 그리워하고 있다.

 

선생이 한 많은 일들을 짧은 지면에 모두 소개할 수 없어 안타깝다. 변진수 선생은 오랫동안 앓아온 당뇨로 인하여 분당의 아들 집에서 투병 생활을 하다가, 2006년 8월 7일 오후 3시 30분, 81세의 일기로 운명했다. 김해와 여성을 위해 헌신과 봉사와 열정을 쏟아부으며 살았던, 아름답고 강인했던 여성이었다.

조카며느리 나갑순 김해여성복지회관 부관장이 기억하는 변진수 선생

"여성 지위 향상 위해 노력한 김해의 큰 어른"
김해여성복지회관 부관장을 맡고 있는 나갑순(수필가·가야여성문학회 회장) 씨는 변진수 선생의 집안 조카며느리이다. 나 씨에게 선생은 '언제나 다정하고 온화한 모습으로 여성이 지녀야 할 부덕과 사회봉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며 여성들의 지위 향상을 위해 여러 가지 일들을 해 오신 집안의 어른'이었다. 그리고 김해의 큰 어른이었다. 나 씨는 "처음 내가 본 아지매는 집안의 어른으로서보다 김해지역의 여성 봉사자로서 더 자리를 굳게 지키고 계셨다. 항상 소탈하시고 은은한 품위는 많은 여성들에게 귀감이 되어 적십자를 비롯해서 여러 봉사단체의 활동으로 늘 분주하셨다"고 회고했다. 선생의 권유로 김해여성복지회에 가입한 나 씨는, 고인의 뜻을 기리며 현재 김해여성복지회관을 위해 일하고 있다.

사진제공=김해여성복지회관

변진수 선생 소탈하고 은은한 품위를 느끼게 하는 변진수 선생 변진수 선생 다섯살 난 단발머리 소녀가 변진수 선생이다. 가운데는 부친인 수주 변영로 선생의 젊은 시절 모습.
변진수 선생(맨왼쪽)과 동기생들 배화고녀 갈래머리 소녀 시절의 변진수 선생(맨왼쪽)과 동기생들
변진수 선생 고 변진수 선생이 김해 여성들의 마음이 담긴 회관 건립을 기념하는 비석 옆에 서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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