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농업혁명의 싹을 틔우다
우리나라 최초로 비닐하우스 재배 김해의 큰 농업인(1926~1985) 박해수
소작농 가정 맏아들로 태어나 열여덟살에 소년가장 돼 생계 책임
박해수 씨는 1926년 김해군 가락면 식만리(가락면은 1989년 부산 강서구에 편입됨)에서 태어났다. 식만(食滿)은 '밥 만개'를 뜻하는 말로, 땅이 기름져 밥걱정이 없는 갯가라고 해서 붙여진 마을이름이었다. 박 씨는 식만리 소작농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열여덟에 부친을 여의고 소년가장이 된 그는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여덟 식구의 생계를 위해 일을 했다. 인근 양계장에서 일을 하며 쌓은 경험과 푼푼이 모은 돈으로 양계사업을 시작했으나 실패했다. 박 씨는 가산을 정리하고 어방동으로 이사 와 감나무 과수원을 구입해 농사를 시작했다. 양계와 양돈도 했으나 다시 실패했고, 일구고 있던 땅은 황무지에 가까웠다. 실패의 경험은 농사를 짓는 데도 공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 박 씨는 이 때부터 농사 연구를 시작했다.
"그 시절에는 제대로 된 영농서적을 구하기도 힘들었습니다. 형님은 일본의 영농서적과 영농잡지를 구해 초등학교 때 배운 일본어 실력으로 밤낮 없이 연구하고, 시험재배를 했습니다." 박해수 씨의 해원농장에서 일하며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촌동생 박홍배(74·구산동) 씨는 늘 농사 연구에 빠져 있던 고인을 회고한다.
일본 영농서적·잡지 탐독
1958년 기름 먹인 한지 이용 배추 재배 도전해 이듬해 2월 성공
1960년 본격적인 비닐하우스 재배
1950년대 후반 일본에서는 비닐을 이용한 농업이 시도되고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비닐이 생산되기도 전이었다. 1958년, 밤낮으로 고민하고 연구하던 박 씨는 한지에 기름을 먹이는 시도를 했다. 부인 배애자 씨가 밤새 남편을 도왔다. 배추씨를 심고 그 위에 기름 먹인 한지 고깔을 씌웠다. 이 방법으로 다음해 2월 배추 재배에 성공했다. 11월에는 오이, 가지, 고추도 같은 방법으로 재배에 성공했다. 11월에 오이를 본 당시 사람들의 놀라움은 컸다. 그리고 박해수 씨에게는 한줄기 빛을 본 날이었고, 평생 걸어가야 할 숙명의 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또한 이 나라 농업 혁명의 싹이 트는 첫걸음이었다.
헌 문짝을 대어 비닐하우스를 만들며 계속 연구를 하던 중, 박 씨는 공업용 비닐을 씌워 만든 터널형 온실에서 오이 가지 고추를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
1960년에 농업용 비닐이 국내에서 생산되기 시작했고, 박 씨가 목재말목에 대나무 대를 휘어 연결하는 방법을 찾아내면서 비닐하우스 재배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박 씨는 농사일을 아내에게 맡기고 이 방법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동생 준홍 씨를 비롯한 마을의 5가구가 먼저 시작했고, 곧 김해 전체로, 경남으로, 전국으로 보급되었다. 박 씨는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되었고, 박 씨의 '해원농장'에는 견학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아마, 돈을 벌려고만 했으면 크게 벌었겠지요. 겨울에 참외를 작은 트럭으로 한 차 팔면 논 한 구역을 살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형님은 그 돈을 계속 연구하고 새로운 작물을 시험 재배하는 데 투자했습니다." 박홍배 씨는 박해수 씨가 큰 뜻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비닐하우스의 성공은 김해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비닐하우스 재배가 성공하면서 비닐은 물론, 농사 관련 각종 사업이 활기를 띠었다. 비닐하우스의 구조물로 사용되는 대나무를 실은 트럭이 줄지어 김해를 찾아왔고, 진례면에서는 비닐하우스 위에 덮을 가마니를 짜느라 기계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해원농장과 박해수 씨의 동생 준홍 씨가 경영하는 어방농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도 김해 사람들이었다. 김해에 회사도 공장도 변변히 없던 시절, 박해수 씨의 농장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직업을 가지고 가정을 돌볼 수 있는 안전한 생활을 의미했다.
당시 부산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부대는 양채류를 일본에서 수입했다. 우리나라 농부들이 셀러리며 레터스가 먹는 것인지 아닌지, 어떻게 재배하고 어떻게 먹는지도 모르던 시절, 박씨는 양채류 재배에 도전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재배에 성공한 박 씨는 미군 부대를 찾아갔다. 처음에는 박 씨가 생산한 셀러리와 레터스를 보며 한국에서 재배한 것이라고 믿지 않던 미군들이 재배 현장을 확인하고 나서야 납품을 하게 했다니, 박 씨의 시도가 얼마나 획기적인 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본에서 양채류를 수입하던 미군부대는 해원농장과 계약을 했다. 미군부대에 납품하려면 토양검사를 비롯해 조건이 까다로웠는데, 그 모든 걸 통과하고 납품하기 위한 박 씨의 노력 역시 엄격하고 치밀했다. 그 노력은 경기도 문산에 있는 미군부대까지 납품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서울 남대문시장에 나와 있는 고등소채의 70%가 김해에서 생산된 것이었지요. 김해는 경남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큰 농산물 생산지였습니다. 김해가 최고였지요." 옛 일을 추억하는 박홍배 씨의 말에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자비로 연수원 세워 무료 영농교육
박정희 전 대통령 두번 김해 방문
60세로 한국 농업 선각자 삶 마쳐
농사를 지으려면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박 씨는 자비로 연수원을 세워 선진농업을 배우려는 농업인들을 무료로 연수시켰다. 신어산 등성이를 개간해 고랭지 재배에 착수했고 이것도 성공했다. 사재를 들여 마을길을 넓히고, 경지정리를 하는 등 김해를 위해서 한 일도 많다. "박해수 씨, 참 고마운 사람이지"라고 말하는 김해의 어르신들이 한 세대 전의 그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이 나라가 아직 가난하고 배고팠던 시절, 1960년대에 국가는 '농업인 박해수'를 높이 샀다. 박 씨는 1962년 농업기술상 수상, 1963년 동탑산업훈장 수상, 1966년 경상남도 자립상 수상, 1967년 5·16민족상(산업부분 본상)을 수상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박해수 씨를 만나기 위해 두 번이나 김해를 방문했다.
"박 대통령님은 수로왕릉 앞에 마련된 자리에서 연설 처음부터 끝까지 형님의 자랑과 치하만을 이야기했습니다." 박홍배 씨의 기억으로 듣는 그 날의 기억은 가슴 설레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팠다. 대통령이 농부를 만나기 위해 찾아오던 날도 있었건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농업과 농업인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을 했던 박 씨는 1980년에 과로로 인한 중풍으로 쓰러졌다. 6년 동안 말문을 닫은 채 늘 해원농장을 바라보았다는 박해수 씨는, 1985년 향년 60세로 평생 만지고 일구었던 흙의 세계로 돌아갔다.
김해시는 지난 2008년 11월에 박해수 씨가 비닐하우스를 처음 재배한 곳에 기념비석을 세웠다. 삼안동 주민센터 근처 어방3교 앞, 분성로 579길 입구에 조성된 작은 공원에 기념비석이 서 있다. 어른 무릎정도 높이의 오석에 '비닐하우스 최초 재배지 /이곳은 1960년 고 박해수 씨(1926~1985)께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비닐하우스 시설을 이용하여 농작물을 재배한 곳입니다. 2008. 11. 김해시장' 이라고 새겼다.
박해수 씨는 한평생 김해의 흙을 만지며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큰 농부였고, 이 나라의 농업에 지대한 발전을 가져온 선각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