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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석 김종대.

작성일
2018-10-05 13:47:57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
1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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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석 김종대

아석 김종대

흥선대원군 "손자의 서예 스승이 돼주오"
시·서·화·전각으로 망국의 한 풀어낸 선비 아석 김종대 我石:1873~1949

조선의 선비들은 시·서·화를 즐겼다. 선비들의 문인화는 추사 김정희를 정점으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문인화와 전문 화가에 의한 문인화로 나뉘어졌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전업작가들에 의한 그림이 등장한다. 시·서·화가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 아니라, 그림만 남은 것이다. 김해 출신의 구한말 관리이며 유학자였던 아석 김종대(我石 金鍾大. 1873~1949)는 삶이 다하는 날까지 사라져가는 문인화를 붙잡고 있었던 인물이다. 아석의 글씨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손자의 스승으로 청할 만큼 명필이었다. 개화와 근대를 내세우는 분위기 속에서 전통적 가치관이 무너져가던 시대, 아석은 선비의 지조와 절의를 지키며 망국의 한을 시·서·화·전각으로 풀어낸 문인 서화가로 살았다.

거연정

김해시 한림면 용덕리 수조마을에 있는 '거연정'. 아석 김종대가 지은 강학서당으로 후학을 양성했던 곳이다.
박정훈 객원기자 punglyu@hanmail.net

외종조부 차산 배전으로부터 사서삼경·시문서화 배워 글씨와 그림 뛰어나 '천재'라 불려

아석 김종대는 1873년 김해 상동면 대감리 외가에서 아버지 창수(昌壽)공과 어머니 분성 배씨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호 아석은 주자의 싯구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에서 따왔다. '금서(琴書:거문고와 책)를 사십 년 갈고 닦았지만 산중의 객이 되어 자연과 더불어 산다'는 주자 시의 정취를 호로 가져온 것이다.

아석은 6세 때 부친과 외조부 배환에게 글을 배웠고, 외종조부 차산 배전으로부터 사서삼경과 시문서화(詩文書畵)를 배웠다. 글씨와 그림이 뛰어나 향리에서는 아석을 천재라고 불렀다. 아석의 조부 김규한은 성재 허전(김해뉴스 3월 28일자 '인물열전' 참조)의 문도였고, 부친은 대눌·소눌(김해뉴스 2011년 12월 21일자, 28일자 '인물열전' 참조)과 벗이었으며, 아석 역시 대눌·소눌에게 학문을 배웠다.

아석은 10대때와 갓 스물에 응시한 과거에 두 번 낙방한 아석은 심기일전 더욱 과거공부에 매진한다. 하지만 갑오년(1894)에 갑오경장이 발표되며, 조선이라는 국호는 사라지고 과거제도는 폐지되며 모든 제도와 법이 서양식으로 바뀌었다. 아석은 과거에 응시할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개인적 상황에 놓인다.

이 때 흥선대원군이 아석의 서화를 보고 크게 칭찬하며 만나기를 청했다. 대원군은 아석을 불러 손자 문용의 서예공부를 부탁했다. 아석은 대원군과의 교유로 서화 예술에 대한 감각을 더욱 높였다.

관직생활 중 일제 단발령에 항거 34세때 사직 후 김해로 낙향
영남 선비들과 시서화로 교유

32세 때(1904) 법부주사로 등용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했으나, 34세 때 김해로 낙향했다. 일제의 강압에 의한 단발령에 항의하여 사직한 것이다. 당시 조정관료들은 단발하고 양복으로 입으라는 명을 받았고, 아석은 고위 간부들로부터 단발을 종용받았다. 아석은 부모의 명을 받고서 시행하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다가 결국 사직했다. 동료들 중 홀로 끝까지 단발령을 거부하여 사직한 이 일은 당시 대한매일신보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이 때에 아석은 시 한편을 남겼다. "十世(십세)동안 江湖(강호)에서 옛 寒士(한사. 가난한 선비)의 본분을 지켜 왔는데 / 성글은 재주로 감히 관직에 어울린다 하리오. / 어버이 뜻을 어기며 녹을 훔침은 내 뜻이 아니라 / 衣髮(의발:의복과 머리)은 아직도 온전하니 마음은 다시 트이네." 서울대 김종철 교수는 논문 '아석유고에 대하여'에서 이 시를 "아석의 시 세계를 조망하는 데 중요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아석 김종대 근영 아석 김종대 근영
아석유고(我石遺稿) 아석유고(我石遺稿)

낙향한 아석은 영남의 선비들과 시서화로 교유했다. 아석의 시는 묘사가 뛰어났다. 아석이 남긴 시 '산촌모경(山村暮景 산촌의 해질 무렵 풍경을 읊은 시)'을 감상해 보자.

"해지자 외딴 마을 고요한데 / 산들바람이 대숲을 지난다. / 소들은 골목으로 나뉘어 집으로 가고 / 새들은 산그늘에서 즐거이 노래하네. / 언덕 나무에는 연기가 자욱이 스미고 / 뜨락의 우거진 풀에는 이슬이 맺힌다./ 문득 창에 빛이 어린 듯하여 / 바라보니 둥근 달이 중천에 떴네."

김종철 교수는 "아석의 시는 현실에 대한 적극적 비판에서 한 발 물러나 자기를 지키고, 뜻이 맞는 벗들과의 교유와 수창(酬唱:시가(詩歌)를 서로 주고받으며 부름)에서 즐거움을 찾고, 자연으로 물러난 삶의 정당성을 찾는 과정의 산물"로 분석하고 "아석은 단발에 항거하여 자신을 지킨 것과 일맥상통하는 삶과 문학을 보여주었다"고 설명했다.

아석의 글씨와 그림은 이미 당대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림과 글씨를 청하는 수많은 요구가 아석에게 쏟아졌다. 얼굴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청도 허다했다.

서예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지만 아석은 문집 '아석유고'에 서예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기록을 남겼다. "대저 서예의 어려움은 글보다 더 심하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서예를 전공한 사람은 많으나 그 도를 얻은 사람은 없는 것이다. 내가 배운 것이 없는데 어찌 감히 도를 얻어 남에게 전할 만한 서법이 있다 하겠는가?"

아석은 글씨를 배우기 위해서는 고인(古人:옛 선인)의 글씨에서 법획을 먼저 익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뒤에 글씨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고인의 일정한 법획을 얻어야 한다. 그런 후에 기세를 따라 운필한다면 마침내 자체를 이루어 묘함을 얻었다고 말할 것이다." 아석의 서예술론은 필법을 충분히 익힌 다음 자신의 세계를 이룬다는 원칙론에 입각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일찍이 획(劃)은 사람의 골육(骨肉)과 같다고 보았고, 자(字)는 사람의 용의(容儀:몸을 가지는 태도)와 같다고 여겼다. 骨만 추구하면 수삽(羞澁:몸을 어찌하여야 좋을지 모를 정도로 수줍고 부끄럽다는 뜻)하여 화려함이 없고, 肉만 숭상하면 비대하고 누추해서 기운이 없게 되며, 容을 잃으면 위엄과 근신함이 없게 되고, 奇(기)만 추구하면 괴이한 데 빠지고, 예쁘게만 하면 속됨에 물들게 된다. 그러므로 항상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그 중정을 얻어야 되는 것이다. 이 또한 격물치지의 학문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아석은 기본과 원칙에 충실한 서예를 추구했다. 부산대 이성혜 교수는 '아석 김종대의 서예술론'에서 "서예에서 그 법을 얻지 못하고 단시 모사하는 것만을 일로 삼으면 도가 아니다. 도가 아니면 군자는 반드시 먹을 행하지 않는다는 아석의 말은 왜 서예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아석에게 서예는 도를 실천하는 과정이었다"고 설명했다.

서예도 뛰어나지만, 아석의 사군자화는 '김해 문인화맥'의 전형적인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아석의 문인화는 차산 배전으로부터 출발하여 대원군을 통해 안목을 넓혔고, 근본적으로 추사 김정희의 서화 정신과 닿아 있다. '남종문인화풍(학문과 교양을 갖춘 문인들이 비직업적으로 수묵담채를 써서 내면세계의 표현에 치중한 그림의 경향)'의 아석 서화예술의 맥은 제자인 수암 안병목에게 이어졌고, 이후 현대의 운정 류필현과 한산당 화엄선사에게 이어졌다. 김해문화의전당에서는 지난해 '김해전통서화의 맥' 기획전을 열어 차산 배전과 아석을 비롯한 김해 문인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한 바 있다.

한림 수조리에 '거연정' 짓고 후학 양성·김해전통서화 맥 이어

아석은 만년에 고향인 한림면 수조마을에 강학 서당 '거연정'을 짓고 후학들을 양성했다. 저서로 '아석유고'와 '서소만록' '금강산유람기'를 남겼다. 격변의 시대를 살았던 아석은 많은 시와 글씨, 그림을 남기며 마지막까지 조선 선비로서의 삶을 지켰다. 1949년 9월 18일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1천 여 명의 사림들이 운집하여 유림장을 거행했고, 후학들이 주도해 '거연정유계'가 결성했다. 지금까지 수조리 거연정에서 아석을 기리는 제가 봉행되고 있다.

아석 김종대의 시문집. 8권 2책, 석인본. 1970년 아들 세구(世求)가 편집, 간행했다. 권두에 안붕언(安朋彦)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종질 응구(應求)와 외손 조동석(曺東錫)의 발문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다. 권 1·2에 시 391수, 권 3·4에 잡저 2편이 수록됐다. 권 5∼7에 서(書) 258편, 제문 3편이 실려 있다. 권 8은 부록으로 시 57수, 상량문 1편, 기(記) 3편, 서(序) 1편, 만사 97수, 제문 10편, 가장·행장·묘지명·묘갈명 각 1편, 문(文) 2편 등이 수록됐다. 그리고 1990년에는 시문집 아석유고(我石遺稿)가 중간된 바 있다.

아석의 시는 호방하고 활달하다. '세병관(洗兵館)' '충렬사(忠烈祠)' 등에는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나타나 있다. 잡저 중 '서소만록'은 1891년(고종 28년) 2월 1일부터 1947년 7월 11일까지 56년간 살아온 역사를 일기체로 쓴 것이다. 국가 대사를 비롯하여 사사로운 일까지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특히, 이 가운데에는 대원군 이하응의 정치적인 책략, 동학란의 전모와 그 영향, 태양력 사용의 배경, 갑신정변의 전모, 경운궁의 건설역사, 러·일전쟁, 명성황후시해, 국권 침탈 등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어 역사적 참고자료가 된다.

'금강산유람일기'는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적은 일기로, 그 노정과 명승고적을 감회와 함께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밖에도 200편에 달하는 서(書)가 있는데, 대원군을 비롯한 당시 대관·친지들과 정치·사회·학문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눈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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