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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강 안언호.

작성일
2018-10-05 13:46:44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
1230
  • 예강 안언호.jpg(15.6 KB)

예강 안언호

예강 안언호

조선말~일제강점기 대쪽 같은 선비 정신으로 후학 양성
강우학맥 주도한 유학자이자 향촌 지식인 예강 禮岡 안언호 (1853~1943)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조선이 붕괴하고 일본의 식민지 침탈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이 시기를 살았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선비로서, 지식인으로서, 또 지배계층으로서 자신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예강 안언호(禮岡 安彦浩 1853~1943)는 19세기 말에 태어나 20세기 초까지 살았던 김해의 선비였고 향촌 지식인이었다. 예강은 성재 허전(김해뉴스 3월 28일자 '인물열전' 참조)의 문하생으로, 김해지역에서 '강우학맥(남명 조식의 학풍을 이어받고 성재 허전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운 선비들의 학맥)'을 주도했다.
이번호 '인물열전'은 김해에서 평생을 보낸 예강 안언호를 만나본다.

예강재

예강 안언호를 기리는 '예강재'. 진례면 시례리 상촌마을의 후손 집 뒤에 있다.

성재 허전의 학문세계에 심취, 27세때 서울로 찾아가 문하생 돼
성호 - 순암 - 하려 맥 학풍 이어 학문·사색 통해 도·덕 쌓기 주력
남명의 산해정 찾아가 복원
동문들과 '수학계' 만들어 지역 인재 육성·향촌 지식인 결집
전통적 가치관과 풍속 지켜내

예강 안언호는 1853년(철종 3년) 김해 시례리에서 부친 석원(碩遠)공과 어머니 재령 이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익천, 호를 예강이라고 불렀다.

예강의 부친은 아들에게 학문을 가르침에 있어 엄격했다. 예강은 부친의 뜻을 받들어 학문을 닦는 데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예강은 타고난 품성이 온화하고 끈기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성실하게 책을 읽어 집안과 마을의 어른들이 모두 감탄했다. 6세에 '효경'을 읽었고, 13세 때 인근 금곡리의 '용봉제'를 오가며 노상익·노상직(김해뉴스 2011년 12월 21일자, 28일자 '인물열전' 참조) 등과 교제했다. 경전을 익히는 틈틈이 예강은 과거 준비를 했는데, 이는 부친을 위해서였다. 자신은 과거에 뜻이 없었다.

예강은 성재 허전의 문하생이다. 성재가 김해도호부사로 부임해 왔을 때 예강은 12세 소년이었기에 그의 문하생이 되지는 못했다. 예강은 27세 되던 해에 서울에 있는 성재를 찾아가 문도가 됐다. 성재는 성호 이익-순암 안정복-하려 황덕길로 이어지는 학풍을 따르는데, 순암 안정복이 예강의 선조이다.

성재는 "과거공부는 마음을 수양하는 데 해가 될 것 같습니다"라는 예강의 말을 듣고 "선비는 과거로 등용해 입신해야 하니 과거공부를 하는 것이 옳다"고 권했다. 29세 때 예강은 부친과 함께 한성시에 응시했다. 부친은 오랫동안 관리를 배출하지 못한 집안을 일으키고자 아들이 급제하길 바랐으나, 예강은 자신의 답지를 부친의 이름으로 냈다. 이 시험에서 '제일'에 뽑혀 이듬해 회시에 응시하게 됐지만, 임오군란으로 시험이 폐지되었다. 예강은 33세 때 회시에 다시 응해 합격했다. 부친은 드디어 생원의 직함을 얻었다. 과거를 중시한 당시 사대부들의 생각과 부친의 근심을 들어주려는 예강의 효심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이 일로 예강의 이름은 전국의 선비들에게 두루 알려졌다. 성재도 예강에게 친필 편지를 보내 축하해 주었다.

이후로 예강은 부친의 명을 따라 한 두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점차 과거를 보지 않을 뜻을 굳혀갔다. '예강집'에는 그 마음을 남긴 글이 있다. "대개 사람이 배우면 커서는 실행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집안에서 실행하는 것이 나라에서 실행하는 것만 하겠는가. 만약 나라에서 실행하려고 한다면, 조정에서 임금께 신명을 바쳐야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간혹 과거공부를 해서 과장에 출입하기를 면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 이제 내 나이가 이미 40여 세. 필경 이루어야 할 것이 무엇 있을까? 하물며 세도가 다시 옛 같지 않고, 진취할 때도 아닌 터이니. 결국 미련 없이 돌아와 옛 글들을 다시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고 성품을 길러 늘그막의 계획이라도 이루고자 한다."

논문 '예강 안언호의 삶과 지식인 의식'을 쓴 김철범 경성대 한문학과 교수는 이 일을 "예강이 과거를 포기하는 결단을 두고 '歸來(귀래:돌아간다는 뜻)'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에서 우리는 그의 과거 포기가 부조리한 현실을 부정하는 비판의식의 소산임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예강의 계획은 도(道)와 덕(德)을 이루는 것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학문과 사색을 통해 덕을 쌓는 공부를 스스로 기약한 예강은 조선말의 유학자이자,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예강은 남명 조식이 학문을 닦았던 산해정(김해뉴스 2월 29일자 '인물열전' 참조)을 찾았다. 산해정을 복원하고, 방산 허훈·효산 이수형 등 동문들을 초청해 학문을 토론하고 '향음주례'를 실시하며 고을의 풍속을 교화시키려고 노력했다. 밀양 유림들이 '성호선생문집' '하려선생문집'을 간행할 때에도 적극 참여했다.

1915년에는 성재의 영정을 서울에서 경남 산청의 이택당으로 옮겨 봉안했다. 성재의 영정은 김해를 경유해서 갔는데, 예강이 제문을 지어 올리고 제사를 올리며 스승의 학덕을 기리는 데 앞장섰다. 예강을 비롯해 성재를 기리는 문도들은 '취정보유계'를 결성하여 향촌사회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결의했다. '취정보유계'는 김해향교 옆에 성재를 기리는 '취정재'를 건립하는 한편, 1928년 성재의 영정을 모셔와 석채례((釋采禮. 봄철에 나는 생야채로 스승을 기리는 제례를 올리는 의식)를 모셨다. 예강이 이를 기념하는 기문을 지었다.

기문에는 "젊은 후배들아. 우리를 뒤이어 선생의 도를 오래도록 지킬 책임이 너희들에게 있구나"라는 대목이 있다. 성재의 학문을 중심으로 김해지역의 지식인들을 결집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예강은 시례리에 있던 홍립재를 중수해 학생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치고, 지역의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도 힘썼다. 동문들과 '수학계'를 조직해 자금을 모아 강학의 범위를 마을의 홍립재에서 진례방(진례 전체를 이르는 이름)으로 넓히기도 했다. 유학을 구심점으로 향촌 지식인들을 결집하여 학문과 교육을 통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고자 함이었다. 예강은 세상의 변화 속에서 무너져가는 전통적 가치관과 야박해져가는 풍속을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예강은 김해를 효우(孝友: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깊음)의 고장으로 자랑스럽게 여겼다. 특히 진례방이 배출한 충신과 효자와 우애있는 형제를 널리 알렸다. 송빈(임진왜란 때 김해 남문을 지킨 인물) 등 충신들을 배향한 송담서원 표충사와, 효자 반석철을 기린 정려비, 안씨 집안의 대진·대임 형제의 우애가 담긴 훈지정을 소중히 했다. 반효자 정려비와 훈지정에 시를 남겨,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효와 우애를 지키는 마음은 변하지 말아야 한다고 뜻을 밝혔다.

예강은 자신이 거처하는 곳에 "말을 할 때에는 항상 몇 번이고 생각하면서 신중히 하고, 행동은 얇은 얼음 위를 걷는 것 같이 하며, 경으로써 바르게 하고, 의로써 방정하게 한다"는 글을 붙여놓고 경계로 삼았다. 병석에 누워서는 자제들을 불러놓고 "이 말에 세상의 참된 진리가 다 들어 있다"며 평생 지키면서 살아가길 당부했다.

예강은 조선시대 말에 태어나 왕조의 몰락과 일제 식민지를 거치는 동안 선비로서 지식인으로서의 정신을 지키며 살았다. 1943년 8월 14일 향년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예강을 기리는 '예강재채례'
후손·지역 유림들 매년 음력 3월에 거행

예강재채례

지난달 30일 후손들과 유림들이 엄숙하게 '예강재채례'를 올리고 있다.
박정훈 객원기자 punglyu@hanmail.net

예강이 태어난 가문인 광주 안씨는, 고려 태조 왕건을 도운 고려대장군 안방걸을 시조로 한다. 임진왜란 이후 예강의 8대조인 경지공이 김해 시례로 이주한 이후, 현재까지 진례면 시례리 상촌마을에 후손들이 살고 있다. 상촌마을에는 예강을 기리는 예강재가 있고, 매년 음력 3월에 유림들이 모여 제를 봉행한다. 예강의 후손과 제자들과 유림들이 지내는 제사는 다음 대로 이어져 계속 지내고 있다.

지난달 30일, 예강재에서는 후손들과 유림들이 참석한 가운데 예강 선생에게 올리는 석채례가 거행되었다. 비가 왔지만, 유건을 쓴 유림들이 예강재를 찾았다. 마당에는 차일이 쳐지고, 마당에 자리가 펼쳐졌다. 예강재 입구에서는 안병곤(훈지정 화수회 사무국장) 씨가 시도기를 받아 정리하고 있었다. '예강재채례시도기'는 제를 올리는 일시와 참석한 사람들을 수십 년째 기록한 책이다. 유림들이 미리 적어오는 시도기에는 이름, 관향(성씨의 본관), 주소가 적혀 있다. 예강의 후손으로 상촌마을에서 평생 살아온 안봉환(지정종중 종회장) 씨의 지휘를 받아 아들 안재휘·안재룡 씨는 제례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예강재 안팎을 오가며 분주했다.

안재휘 씨는 "시대가 변하면서 풍속이 많이 바뀌기도 했고, 또 우리 스스로 우리 것을 너무 많이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서양철학과 문명이 결코 대신할 수 없는 가치가 우리에게 있다"며 "예전에는 예강집을 놓고 강론도 펼쳤다. 요즘 젊은이들 눈으로 보면 이 의식이 번거로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예강 할아버님(고조부)이 지키고자 한 예와 도덕을 이 의식을 통해 다시 되새겨보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비가 내리는 중에도 예강재채례는 엄숙하고 경건하게 올려졌다. 예강 안언호의 정신은 유림들과 후손들에게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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