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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치문 의사<하>.

작성일
2018-10-05 13:44:24
작성자
정창신
조회수 :
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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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치문 의사

배치문 의사

노동·언론운동으로 항일·독립 큰 획
본지 독점보도 '고향 잃은 독립유공자' 배치문 의사 - 그의 삶과 독립운동 발자취 (하)

대의를 위한다지만, 소신과 신념을 평생 일관되게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일제가 온 나라를 핍박하던 엄혹한 시절이었다면. 배치문 의사는 그런 삶을 산 분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호 '인물열전'에서는 배치문 연구자인 권도균씨를 통해 배 의사의 사상과 철학을 살펴본다. 권씨는 전남 목포의 시민운동단체인 목포KYC(한국청년연합 목포지부)의 상근자(사무국장)로 활동을 하던 중 배 의사를 접했다. 목포KYC에서는 지난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목포의 역사와 문화를 찾고, 자랑스러운 전통을 발굴하는 사업을 기획했다. 이 과정에서 권씨가 일제시대 신문자료를 뒤지던 중 특히 주목한 인물이 배 의사였다.

목포 기독교 영흥학교 교사로서 4·8만세운동 핵심인물 역할 항일 비밀결사단체 의열단 입단
좌우합작운동 신간회 활동, 1925년 목포제유노조사건
1929년 광주학생운동 지도자 언론 '호남평론' 기자·편집장 나라와 백성 위한 삶 실천

1919년 서울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을 시작으로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목포에서는 4월 8일 만세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기에 '4·8만세운동'이라 부른다. 배치문 의사는 4·8만세운동의 핵심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권도균씨는 "지역의 기독교인들, 학생들, 지역민들과의 연락을 맡았다고 전해진다. 학교 측의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검증되지는 않았지만 목포지역의 기독교학교인 영흥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으며, 대중적으로 그 영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목포 4·8만세운동 탓에 일본경찰에 검거된 배 의사는 1년 6개월의 형량을 언도받았다. 이듬해 4월 28일 정치범 특사로 출옥한 배 의사는 중국으로 망명했다.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해외로 옮긴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일제의 무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보다 더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인물들이 많았다. 같은 뜻을 가진 독립지사들은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항일비밀결사단체인 의열단을 조직했다. 의열단의 이름은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猛烈)히 실행한다'고 한 데서 유래한다. 배 의사는 중국 망명 중 의열단에 입단했다.

배 의사는 3.1운동 이후 의열단과 좌우 합작운동 단체인 신간회 등을 통해 목포지역에서 노동·사회주의·언론 영역 등의 분야를 중심으로 비중있는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권씨는 "배 의사가 활동한 그 하나 하나의 사건이 한민족의 독립운동사에서 큰 획을 긋는 사건들이라, 1920~40년대의 독립운동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바라볼 수 있는 한 모습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배 의사는 의열단에 가입한 후 귀국했다. 나라를 빼앗기자 가장 고통받는 계층은 농민과 노동자들이었다. 조선의 백성이었을 때도 곤궁했던 그들은 일제하에서도 수탈과 억압의 대상이었다. 배 의사는 귀국 후 목포에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897년 개항한 목포는 다른 지역보다 상공업이 일찍부터 발달한 곳이었다. 1921년 당시 목포에는 22개의 회사가 있었다. 2개 회사는 조선인 대주주가 참여했고, 나머지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회사였다. 일본 회사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상황은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목포의 노동현실은 민족적·계급적 모순이 드러났고, 그 대립 또한 첨예했다.

배 의사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노동운동으로 이어졌고, 그는 1925년 목포를 떠들썩하게 한 '목포제유노조사건'에 관여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3개월에 걸친 노조 파업과 일본인 사주 측의 탄압, 일본경찰의 검거 등이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모았다고 보도했다. 전국적으로 후원회도 결성되고 동정금과 격려문도 답지했다고 한다. 목포는 물론 전국 노동계의 관심이 집중됐던 이 일로 인해 배 의사는 1926년 3월 27일 체포되었다가 6월 26일 풀려났다. 권씨는 "배 의사는, 목포지역 노동운동사의 획기적 사건인 '목포제유노조 파업' 사건의 외부 지도자로 활동했다. 완전한 성공은 아니었지만,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하고, 민족적인 차별대우까지 받았던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힘쓴 인물로 생각된다"고 설명했다.

의사 배치문 기적비 삼계동 화정공원으로 옮겨진 '의사 배치문 기적비'앞에서 매년 3·1절 기념식과 추모식이 거행된다.
박정훈 객원기자 punglyu@hanmail.net
배치문 의사의 후손 (왼쪽부터) 배호순·배종태(배 의사 사후양자)·배종록씨 배치문 의사의 후손 (왼쪽부터) 배호순·배종태(배 의사 사후양자)·배종록씨.
김태중 여사,딸 배혜자씨,사위 최의호씨,최의호씨의 아들,배 의사의 어머니 김광덕 여사 배치문 의사의 부인 김태중 여사가 딸 배혜자(뒷줄 오른쪽 여성)씨와 사위 최의호(가운데 남성)씨의 아들을 안고 있다. 왼쪽이 배 의사의 어머니 김광덕 여사이다.
사진제공=배종태 씨

호남 상공업의 중심지였던 목포에서 활동하던 지사들은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졌다. 배 의사의 활동 역시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민족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배 의사는 1926년 2월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 배 의사는 1927년 7월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인해 다시 검거됐다. 1929년 4월에 석방된 배 의사는 목포로 돌아와 신간회와 언론활동을 전개했다. 권씨는 "목포의 신간회 임시지회장을 한 차례 했지만, 신간회 해소 이후에도 배치문을 다루는 신문 기사에 '목포 신간회장' 혹은 '신간회 지회장'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으로 보아 목포신간회의 핵심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1929년 11월 초에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목포의 상업학교 학생들이 이에 동조하는 시위를 전국 최초로 전개했다. 배 의사는 이 사건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배 의사는 '호남평론'의 기자로, 2대 편집장으로도 활동했다. 일제강점기를 살아낸 지식인의 삶은 체제에 편입하지 못할 경우 활동의 제약을 받고 신분의 구속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자의 신분은 배 의사가 자신의 언론활동을 통해 독립 의지를 펼칠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배 의사가 호남평론에 쓴 기사들은 지역 현안에서 세계정세의 흐름까지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

일본은 1941년에 '조선사상범예비구금령'을 발표했고, 배 의사는 1941년 3월 10일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이듬해 1942년 5월 20일 목포형무소 수감 중 향년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권씨는 "배 의사는 '대학지도(大學之道) 재명명덕(在明明德) 재신민(在親民) 재지어지선(在止於至善)'을 몸소 실천한 분이 아닌가 생각한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대학(大學)의 첫 머리에 나오는 이 글귀는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며, 지극한 선에 머무르는 데 있다'는 뜻이다. 부산대 한문학과 이준규 교수는 "먼저 인간의 본성을 깨닫고, 한 개인의 깨달음에 그치지 않고 백성을 새롭게 하며, 그것을 변함없이 지켜가며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앎에 그치지 않고 실천에 이른다는 의미"라면서 "일제강점기에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싸웠던 많은 지사들은 이 글귀를 대부분 알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고 말했다.

배치문 연구자 권도균 씨

노동자·농민 기본권 보장, 국민의식 성장·독립 위해 30여년간 불꽃 같은 생애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노동자와 농민의 기본권 보장과 국민적 의식 성장을 위하여 30여 년간 자신의 온 몸을 바쳐 싸운 위대한 대한국인이다."

배치문 의사를 주제로 한 논문 '의사 배치문의 삶과 독립운동 - 1920~40년대를 중심으로'를 쓴 권도균씨는 논문에서 이렇게 썼다.

권씨는 지난 2008년도에 목포대학교 대학원에서 지방사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배치문 의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게 됐다. 권씨는 2008년에 배 의사의 고향인 김해 한림면 명동을 직접 방문했다. 배종록씨와 친척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권씨는 배종록씨 등을 두고 "자료를 찾기가 힘든 시기였는데, 그 정도라도 밝혀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걸 보면 고생이 참 많았을 것"이라면서 사할린으로 건너간 직계 후손들과 연락이 닿지 않는 사실을 못내 아쉬워했다. 김해의 후손들은 수 십 년동안 사할린의 한인사회와 기관에 문의를 하는 등 직계 후손을 찾는 작업을 하고 있다.

권씨는 배 의사를 연구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갖은 탄압과 유혹에 굴하지 않고 민족의 독립이라는 큰 목표를 향해 내처 달려간 인물의 삶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남기기 마련"이라면서 "당장 눈앞의 일에만 매몰되지 말고, 길게, 멀리 바라보며 나아간다면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얻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권씨는 배 의사 연구를 계속할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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