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인의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란 어렵지만, "1919년 4.12 장유면 무계리 의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장유인의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란 어렵지만, 1919년 4.12 장유면 무계리 의거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19년 2월8일 일본 도쿄에서 재일 유학생이 발표한 독립선언에 이어 3월1일 파고다 공원에서 부르짖기 시작한 독립운동은 전국적인 독립만세 시위로 전개되었다.
김해지역의 시위는 3월 30일 밤 김해읍내에서 시작되어 4월 2일 김해읍 장날 장꾼이 많이 모이는 오후 4시경 시장거리의 십자로에서, 3월 31일과 4월 5일에 하계면 진영장터에서, 4월 11일은 명지면 중리의 명호장날을 휩쓸고, 드디어 4월 12일 장유면 무계리에서 가장 치열한 의거운동으로 절정에 달하였으며, 4월 13일 가락면 봉림리의 음지바위 아래에서, 4월 16일 김해읍 이동 뒷산 봄놀이(회취會聚)를 하다가 오후 4시경 부녀를 중심으로 한 독립만세 시위로서 끝을 맺었다.
4.12 장유면 무계리 의거는 당시 김해군 독립운동 중에서도 가장 조직적이고 대규모로서 무려 3천의 군중이 결집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헌병파견소를 포위하여 일대시위를 벌임으로써 3명이 순국(殉國)하고 십수명이 투옥되었다.
이 날을 기념하기위해 장유면민이 중심이 되어 '3.1독립운동기념탑건립기성회'를 구성하여 기금을 모금하고 그 결과 1967년 5월 30일 장유면 내덕리 용두산정에 삼일독립운동 기념탑을 세우고 매년 김해시단위의 기념식을 거행해 오고 있다. 장유인은 팔판산과 불모산의 우람하고 높은 산 아래서 살아온 탓에 항상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지혜를 배워왔다고 생각된다. 자신을 낮춘다는 것이 언제나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산은 거대하면서도 언제나 자기의 위치를 지키면서 남의 것을 넘보지 않고 오히려 모진 태풍까지도 막아주는 덕을 지녔기에 그 산 앞에서는 낮추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처럼 강한 세력을 동원하여 이웃의 영역을 침범하는 파렴치한에게는 분연히 일어나 대항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장유인의 가슴속에는 평소에는 온유하면서도 불의를 보고는 굴하지 아니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웃어른을 공경하는 도덕적인 정신이 흐르고 있다.
바로 이것이 장유인의 정신이며,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장유라는 땅이다.
신도시 조성으로 최근 들어 외부에서 전입한 사람들의 수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 우리 장유에 오기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였던 이곳 장유에서 살게되면 사는 그날부터 장유사람이 되는 것이다. 팔판산과 불모산의 정기를 받고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3.1독립운동기념탑 뒷면에 새겨져 있는 기념탑 설립취지문을 보면 우리 장유인의 기개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민족의 굴욕이란 죽음보다도 참기 어렵고 자유의 회원은 생명보다도 차리리 강하다.
1919년 3월 1일은 겨레의 힘을 묶어 굴욕을 박차고서 자유를 달라 외친 날이다.
서울에서 부른 만세소리가 남북강산으로 퍼져나가 고을마다 메아리쳐 일어나던 때 이곳에서는 뜻있는 이들이 범등포 갯가에 같이모여 의논하고 곧 부락마다 연락하여 약속한 4월 12일 정오 대청천 언덕으로 하나둘 군중들이 몰려드니 자 못 3천여명 지축을 흔드는 북소리, 나팔소리, 만세소리, 그것은 오직 민족혼의 우렁찬 행진이었다.
그날 일본헌병들의 야만적인 총탄발사로 동지들이 쓰러지자 군중은 더욱 분노하여 무계리의 일본헌병출장소를 파괴했으나 김해읍 응원병과 부딪혀 부득이 해산되고 주동자들은 옥고를 겪음으로써 끝났지만 겨레의 혈관속에 그정신 맥맥히 살아있어 마침내 원하던 조국의 독립을 성취했기에 그날 이곳 장유면 동포들이 항쟁한 사적을 새겨 이 고장 후손들에게 전하는 바다.
1967년 3월 1일
이은상 글 김기승 글씨
3.1 독립운동기념탑건립기성회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