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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

작성일
2018-10-05 13:40:17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
3102
  • 남명 조식.jpg(14.8 KB)

남명 조식

남명 조식

제도권을 견제한 조선 최고 재야선비
남명 조식

조선을 대표하는 정신적 기풍을 말할 때, 우리는 조선의 선비를 떠올린다. 선비는 조정에서 국정을 운영하는 정치세력이 아니다.
그렇다고 현실을 떠나 은거만 했던 이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학문을 바탕으로 현실을 비판하되, 속세의 허명에 사로잡혀 정치권에 이용당하지 않고 자신의 학문과 철학을 세상 속에서 펼친 이가 참된 선비라 할 것이다.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은 그런 조선 선비의 외길을 평생 걸어갔다.
남명은 김해에 18년간 살며 학문과 인격을 도야했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남명이 진정한 학자로서의 기반을 다진 곳이 김해 대동의 '산해정'이다.

30세에 처가 있는 김해로 이사와 주동리 원동마을에 '산해정' 짓고
태산에 올라 사해를 바라보듯 학문과 인격 수양에 매진
당대 학자들 남명 찾아 모여들어 사림 기풍 일으켜세운 구심점
제안받은 단성현감 사직소·상소 평생 진정한 학자로서의 외길

조원섭 화백이 남명학연구원과 후손들의 의뢰를 받아 그린 남명 선생 영정

남명의 후예로 평소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흠모하던 창전 조원섭 화백이 남명학연구원과 후손들의 의뢰를 받아 그린 남명 선생 영정. 남명 선생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책을 숙독한 뒤 작업했으며, 말년의 모습을 담은 전신좌상으로 표현했다. 영정제공=경상대학교 고문헌도서관 문청각

남명 조식은 조선조 연산군 7년(1501) 6월 26일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의 외가에서, 아버지 언형(彦亨. 성문관 판교)과 어머니 인천 이씨 사이에서 2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건중, 호는 남명이다.

외가는 '태어나는 아이는 자라서 현인이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명당이었다. 남명이 태어났을 때 외조부는 외손자를 보아 기뻐하면서도, 이씨가의 운이 조 씨의 문중(曺門)으로 갔다고 아쉬워했다 한다. 실제로 '판교 공이 말을 하기 시작한 어린 아들을 무릎에 앉히고 시서를 가르치면 따라 외고 잊지 않으니, 그 뛰어난 재질과 신중함이 어른과 같았다'는 말이 전해온다. 남명이 8, 9세 때에는 큰 병을 앓아 어머니의 근심이 컸다. 그러나 오히려 남명은 "하늘이 저를 낸 것은 무엇인가 할 일을 주고 그를 해 내게 하려 함이었을 것이니, 갑자기 요절할 것이라는 근심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말로 어머니를 위로했다.

다섯 살 무렵 장원급제한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간 이후, 남명은 20대 중반까지 주로 서울에 거주하였다. 이웃에 살던 이윤경(李潤慶·후일 판서벼슬을 지냄)·준경(浚慶·후일 영의정이 됨)형제와 절친하게 지내며 학업을 닦았다. 아버지가 단천군수로 지낼 때 단천에서 천문, 지리, 진법 등 남아가 갖추어야 할 지식과 재능도 익혔다. 두 손에 물그릇을 들고 밤을 지새우며 정신력과 담력을 기르기도 했다.

남명은 20세 때 생원과 진사에 1등, 2등으로 급제했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죽고, 숙부인 언경(彦卿)의 집안이 이에 연루되자 벼슬을 단념했다. 2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고향인 합천 삼가에 장사지내고, 삼년간 여묘생활(상제가 무덤 근처에서 여막(廬幕)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을 했다. 이때에 가난과 싸우면서 백성들이 얼마나 힘든 생활을 하는지 겪은 남명은, 백성의 고단함을 평생 잊지 않았다.

30세에 남명은 처가가 있는 김해로 이사를 왔다. 현 주동리 원동마을이다. 이 곳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공부에 들어갔다. 산해정의 이름에는 태산(泰山)에 올라 사해(四海)를 바라보는 기상과 학문과 인격을 닦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대곡 성운, 청향당 이원, 항강 이희안, 송계 신계성 등 당대의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학자들과 더불어 학문을 논하고 모여드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후학을 길러낸 산해정은 남명 조식이 진정한 학자로서의 기반을 다진 곳이며, 기묘사화 이후 정치권력에 의해 꺾였던 사림의 기풍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구심점이 되었다.

연희단거리패 이윤택 감독은 연극 '시골선비 조남명'속에서 김해에서 학문을 닦은 남명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이 작품은 남명 탄신 500주년을 맞아 경남 산청군과 남명학연구원으로부터 제작지원을 받아 2001년 8월 산청에서 초연되었다. 공연장인 산청 덕산중학교 특설무대에는 7천 여 명의 관람객이 모여들어 진풍경을 이루었다.
이윤택 씨는 "산해정에서 남명의 교육이 시작되었으니, 극 내용에는 김해 이야기가 많습니다. 극 중 택견 장면 연출을 위해 김해 택견인들도 연극에 참여했습니다. 남명은 제도권 안에서 정국 운영의 유학을 펼쳤던 퇴계 이황과 비교해 제도권을 견제한 조선최고의 재야 선비였습니다"라며 남명을 '비판적 지식인'이라 설명했다.

이 작품은 2001년 서울공연예술제에서 대상·연출상·남자연기상·음악상을 휩쓸며 큰 화제를 모았고, 경남도의 지원을 받아 김해를 비롯한 경남 전 지역 순회공연을 가졌다. 남명사상에 관심이 많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초청공연을 했는데, 현재 일본 와세다대학 연구박물관에는 남명의 공연의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조정에서는 수차례 남명을 불렀으나, 선비가 현실정치에 나가 경륜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하고 이용만 당하는 이유를, 권세에 유혹당하고 허명에 만족하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던 남명은 모두 거부했다. 남명은 조정에 나가지 않았고, 잘못된 현실정치를 비판하는 데는 눈치를 보지 않았다.

1555년 조정으로부터 단성현의 현감자리를 제안 받은 남명은 명종에게 단성현감 사직소와 함께 상소를 올렸다. 명종은 갓 스물을 넘겼으며,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시기이다.

산해정

김해 대동의 '산해정'은 남명 선생이 진정한 학자로서의 기반을 다진 곳이다.
박정훈 객원기자 punglyu@hanmail.net

"전하의 국사가 그릇된 지는 이미 오랩니다.(중략) 소관들은 아래서 히히덕거리며 주색이나 즐기고, 대관들은 위에서 거들먹거리면서 오직 뇌물을 긁어모으는 데 혈안입니다. 뿐만 아니오라 내신들은 파당을 세워 궁중의 왕권을 농락하고, 외신들은 향리에서 백성들을 착취하며 이리떼처럼 날뛰고 있습니다.(중략) 나라가 이 지경이고 보면, 자전은 밖의 소식이 막힌 깊은 궁궐 안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나이 어린 선왕의 한 외로운 자식일 뿐입니다."

명종은 소의 내용을 살피기보다 자전(대비)을 과부라 하고 자신을 고아라고 표현한 것에 분개하여, 죄를 물으려 했다. 그러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바른 말을 한 남명의 강직함을 알고 있는 사관과 경연관들에 의해 제지당했다. 남명의 단성소는 사림들의 언로(言路)를 열고, 뜻있는 선비들이 나라 일에 적극적인 관심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남명은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옷고름에 매달고, '경의검(敬義劍)'이라는 칼을 늘 품에 지니고 다녔다. 성성자는 '스스로 경계하여 깨닫게 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남명은 몸이 움직일 때 마다 울리는 방울 소리를 들으며 혹시 잘못된 길로 가고 있지는 않은지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았다. 경의검 안쪽에는 내명자경(內明者敬), 바깥쪽에는 외단자의(外斷者義)라는 명문(名文)을 새겨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은 경(敬)이고,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義)라고 해 이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남명이 사림과 국가에 끼친 영향과 공적은 지대하다. 선비의 기상을 재정립하였고, 벼슬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정치를 비판하는 선비의 직분을 인식시켰으며, 후학들에게 주경과의(主敬果義 . 배운 지식이 능력과 정신으로 승화되어 의로운 행동을 통해 실천되어야 한다는 남명의 교육철학) 학문을 가르쳤다. 남명의 문하생들은 문무를 겸비하고 경륜을 갖추었으며, 임진왜란 같은 국난 앞에서는 제일 먼저 의병으로 나서 싸웠으니, 남명의 교육역량은 우리 민족 교육사에서도 단연 빛난다 할 것이다.

남명은 61세에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덕산 사륜동에 '산천재'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다, 72세(1572)되던 해 2월 8일 운명하였다. 남명은 "죽고 난 뒤 호칭을 '처사(處士.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서 은둔한 선비)'로 할 것"과, "나의 학문은 '경의(敬義)' 두 글자에 집약되는데, 이는 하늘의 일월과 같은 것으로 변할 수 없는 진리니 힘써 지행(持行)할 것"을 당부했다. 남명이 세상을 떠난 후 조정에서는 영의정에 추증하였으나, 일생을 선비로 살다간 남명은 후대에 처사로 불리기를 더 원했을 것이다.

범이 새끼를 품은 형상의 길지 … 매달 두차례 분향

남명 선생의 위패

산해정의 숭도사에 모신 남명 선생의 위패.

남명 조식의 학문과 교육이 시작된 산해정은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 원동마을에 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25호인 산해정은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문을 잠가두고 있으나, 관람객이 전화를 걸면 관리인이 언제든지 달려와 열어준다. 조규태(68)씨는 농사일 보러 가던 중 기자의 연락을 받고 산해정으로 달려왔다.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 두 번에 걸쳐 분향을 올리는 산해정은 늘 정갈하게 청소가 되어 있어 경건한 마음이 저절로 든다. 조 씨는"대동의 유림 10여 분이 매월 두 차례 분향을 올리고 수시로 관람객들이 찾아오니, 깨끗하게 관리가 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 남명 선생에 대해 공부를 하고 오는 분들이 많습니다. 풍수지리에 밝은 분들은 산해정이 있는 이 터가 범이 새끼를 품고 있고 앞이 트여있는 형상이라면서 길지라고 이야기합니다."
조 씨는 한 여름 산해정을 찾은 사람들은 시원한 바람과 산해정 주변의 산자락에 반해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고 귀띔해 주었다. 7년 째 관리인을 맡고 있는 조규태 씨는 이전에 30여 년간 산해정을 맡아 관리한 김병진(86) 씨를 소개했다. 김 씨는 "배워 알고 있는 걸 그대로 실행한 남명선생의 사상은 오늘날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훌륭한 사상"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산해정은 조규태·조용석(72) 두 사람이 관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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