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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치문 의사<상>.

작성일
2018-10-05 13:43:27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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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치문 의사

배치문 의사

천품이 명민하고 불굴의 기백 의열단 가입해 조국독립 헌신
본지 독점보도 '고향 잃은 독립유공자' 배치문 의사 - 그의 삶과 독립운동 발자취 (상)

온 마음을 다해 조국을 위해 살다 간 순국선열의 삶은 언제나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그러나 삶의 궤적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배치문 의사(1890~1942)가 그렇다. 3·1절을 맞아 김해의 의인들을 소개하는 도중 <김해뉴스>는 배치문 의사를 만났다.<김해뉴스 3월 7일자 기사 참조> 매년 3·1절이면 김해에서 추모식을 올리고 있는데도 배 의사는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전남 목포 사람으로 기재돼 있다.
김해의 후손들은 직계 유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추모 사업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제도적 현실 속에서 안타까워하고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사람들의 관심도 조금씩 멀어져간다. 김해의 인물을 재조명하고 발굴하는 '인물열전'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배 의사를 다룬다. 이번호에서는 배치문 의사의 삶과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까지의 과정을 소개한다. 다음호에서는 그의 사상과 철학을 살펴본다.

1890년 한림면 어은마을서 출생
현재의 대성동으로 이사해 김해보통학교 졸업 후 목포 이주

배치문 후손 배종록 씨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를 때의 배치문 의사 가슴에 8158 수형번호가 달려있다. 얼굴 부분이 훼손되어 있다.
사진제공= 배치문 후손 배종록 씨.

배치문 의사는 1890년 김해군 한림면 어은마을에서 아버지 배익화 공과 어머니 김광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배 의사가 태어난 생가는 예전에 허물어지고, 다른 사람들이 새로 집을 지어 살고 있다. 현재 한림로 252번길 44-16이 배 의사가 태어난 생가 터이다. 홍수에 대비해 마을은 언덕 위에 형성되었다. 거북산 자락에 앉은 생가 터에서는 낙동강변 갯벌이 보였다. 배 의사는 향리의 서당에서 열 두어살까지 한문을 수학했다. 김해읍 답곡(현 대성동)으로 이주한 배 의사는 김해보통학교에 입학, 1906년 17세에 졸업했다. 1909년 가족은 다시 전남 목포 창평동으로 이주했다. 목포에서 배 의사 가족은 소매잡화점을 운영하면서 살았다.

목포는 1897년 개항한 곳이다.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 활발했고, 신문화가 유입되었으며, 신교육이 개화한 곳으로, 일본의 침략행위에 대한 증오감이 어느 지역보다 컸다.

집안의 결정으로 배 의사의 사후 양자로 입적된 배종태(68·부산 해운대구 좌동)씨는 집안어른들에게 들은 배 의사의 성품에 대해 "소년시절부터 천품이 명민하고 불굴의 기백과 인내력이 있었으며 학업이 숙달될수록 다른 급우와 달리 사고의 깊이가 크고 넓었다. 지사는 1910년 나라 형편이 어려움에 처하자 이때부터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미래의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고 전했다.

3·1운동 소식 듣고 만세운동 결의
목포서 대대적인 운동 후 검거, 옥고 치른 뒤 중국으로 망명
의열단 활동으로 검거됐을 때 혹독한 고문에도 동지·조직 보호

부모의 잡화점 일을 도우면서 독서를 통해 견문을 넓히던 배 의사의 마음 속에 독립의지가 자라기 시작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 소식은 목포에도 전해졌다. 배 의사는 남궁혁·오도근·김영주·박상열·권영례·오재복·이금득 등 지역 학생들과 운동방법을 논의했다. 또한 서상봉·곽우병·서화일·박여성·박복영·강석동·양석진 등 지역유지들과 예수교의 지사교인들과 함께 지역만세운동을 결의했다. 4월 8일 배 의사는 이들과 함께 목포 지구의 만세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삼천만 동포의 봉기에 우리 목포인들도 적극 호응하자'는 유인물이 거리마다 뿌려졌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가 4월 8일 목포의 집집마다 투입됐다. 오전 10시에 천지를 진동하는 만세소리가 울려퍼졌다. 일본경찰과 헌병은 배 의사 외 40여 명의 애국지사를 검거했다.

1년6개월의 옥고를 겪은 배 의사는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지사들을 만나면서 배 의사의 의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1923년 3월 5일 임시정부 대표자 회의에 보천교(차경석이 창시한 증산교 계열의 종교) 대표로 참석했다. 국내에서의 조직적인 독립투쟁이 시급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배 의사는 의열단에 입단했다.

1924년 귀국해 활동하던 배 의사는 의열단을 추적하던 일본경찰에 다시 검거되었다.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배 의사는 "의열단의 내용은 듣지도 못했다"며 동지와 조직을 끝까지 보호했다.

배 의사의 활동은 독립만세운동에서 끝나지 않고, 노동자와 민중의 삶을 위해 고민하는 진보적 항일운동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배 의사는 기미독립운동 이후 조선 초유의 비밀결사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다시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언론인으로 일제에 정면 대항
1942년 목포형무소에서 옥사

1930년 배 의사는 민족지인 호남평론(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언론인인 김상수(1894~1945)가 동아일보 기자를 역임한 후, 목포에서 김철진·나만성 등과 함께 창립)의 기자로 활동하며 언론을 통한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배 의사가 호남평론지에 쓴 기사들을 보면 당시 의사가 지역과 세계를 바라보던 폭넓고 깊이 있는 시각을 짐작하게 한다.

'나치스 독일은 어디로(1936. 6. 15)', '서반아 외인부대(1937. 4. 15)', '목포고보 설치의 필요와 그 방법에 관한 전론(1936. 6. 15)', '농민에 치명상을 준 춘계폭풍우(1937. 6. 15)', '가정부녀의 취미와 교양(1937. 8. 15)' 등 배 의사의 붓은 이 땅의 삶은 물론, 세상의 흐름에까지 이르렀다. 보통학교 졸업 이후 독서를 통한 공부를 끊임없이 계속하였기에 배 의사의 사상과 철학은 예리하게 세상을 보았던 것이다.

배 의사는 1941년 3월에 일본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일본 경찰은 이를 빌미로 배 의사를 출판법·보안법·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했다. 배 의사는 모진 고문 끝에 1942년 5월 20일 목포형무소에서 53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배 의사의 부인 김태중 여사는 3년 전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유가족으로 노모(당시 70세)와 출가한 외동딸(배혜자)과 사위(최의호)가 있었다. 유가족은 일제의 억압을 견디다 못해 사할린으로 이민을 갔고, 한국전쟁 이후 연락이 끊어졌다.

1982년 건국포장 제1370호에 추서되었음을 증명하는 포장증

1982년 건국포장 제1370호에 추서되었음을 증명하는 포장증이 후손들이 보관하는 기록 파일에 꽂혀있다.

1982년에 정부는 배치문 의사에게 건국포장(애국장 제 1370호)을 추서했다. 배 의사의 제적등본에 '전남 목포'라고 기록되어 있어,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배 의사가 목포사람으로 기재되어 있다. 배 의사는 목포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다가, 김해의 집안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어른을 그렇게 모실 수는 없다"며 김해로 옮겨왔다. 그 뒤, 1989년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에 안장됐다.

배 의사의 고향인 김해 한림의 친척들과 지역민들은 1983년 한림면사무소 앞에 비를 세웠다. 이 비는 2000년 한림 명동 통일동산으로 이전되었다가, 2007년 현재의 삼계 화정공원으로 다시 옮겨졌다. 김해에서는 매년 3월 1일, 이 비석 앞에서 배 의사를 기리는 추모식과 3·1절 기념식을 올린다.

배 의사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까지

30년 넘게 발자취 추적
불탄 목포형무소 기록
부산구치소서 발견

초대받은 후손들, 배종록 씨

1982년 제37주년 광복절 기념식장에 배치문 의사 건국포장을 기념하여 초대받은 후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가운데 앉은 이가 배종록 씨다.

배치문 의사가 독립유공자로 추서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후손들이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배 의사의 기록을 찾고, 독립유공자로 신청한 지 10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교사 출신으로 배 의사의 당질인 배종록 (84·한림면 명동) 씨는 매년 방학때마다 배 의사의 기록을 찾아나섰다. 목포와 서울 등의 언론사와 신간회를 오가고, 전국의 언론사와 도서관 등에서 기록을 찾아 나섰다. 유관기관에 편지를 보내어 '배치문' 이름 석 자가 담긴 것이라면 무엇이든 찾아주기를 간청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으로 목포형무소가 불타 버려 배 의사의 옥사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애태우던 배종록 씨는 배종태 씨와 구치소 기록을 찾아보는 문제를 의논했다. 배종태 씨는 부산구치소 문서 보관실을 방문해 문서를 살펴보았다. 배종태 씨는 "1900년부터 1942년까지의 문서를 하루 종일 조사하다가 '배치문 목포형무소 수감중 옥사'라는 희미한 글자를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고 회고했다.

배종록 씨는 배 의사의 기록을 찾던 중, 배치문 의사를 연구하고 있던 권도균 씨를 만난 일이 기뻤다고 전한다.

"권 선생은 배 의사에 관한 논문을 써서 배 의사의 사상과 철학의 의미를 찾아주었습니다. 후손으로서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권도균 씨는 논문 '의사 배치문의 삶과 독립운동'을 발표했고, 현재 광주교육청에서 근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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