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소리는 우리지역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다. 옛날 농사짓는 농소가 있었다고 농소리이며 농소란 옛날 세력가들의 농장이다. 내삼천 하류와 조만강 사이에 형성된 삼각주와 남향의 아늑한 구릉지에 이루어진 마을로써 농소(農所), 사덕(砂德) 2개 마을이 있다.사덕은 내삼천 하류의 모래등 위에 새로 생긴 마을이며 우리고장 주촌의 끝마을이다. 농소마을 뒷편 야산 조만강가 쪽엔 임진왜란때 왜군들이 쌓았다는 농소 왜성의 흔적이 있다. 이 지역은 고대로부터 수로교통, 전략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가락국시대 때부터 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일대의 패총들과 주변지역에 분포하는 여러 유적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농소리는 땅이 기름지고 들이 평탄하여 농사짓기에 아주 적합한 지역이다. 1982~1984에는 기계화 영농부문에 모범마을로 총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남해고속도로 서김해 나들목과 인접하고 있다.
지명의 유래에 대해선 논란이 많았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주지봉(住持峯) 또는 주주봉(酒主峯)아래의 마을, 혹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과거에 번성한 포구였던 선지리의 배가 정박하는 곳이었던 "주촌지(酒村池)"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하다.
풍수지리설도 한 몫 한다. "옥술잔"형의 명당이 있다는 기록이여러 풍수지리관련 문헌에 나온다.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최근(2003년) "김해향토문화연구소"와 "옥주문화연구회"에서 발굴한 1800년 초기의옛 "김해부 지도"이다. 이 지도에는 주촌이 "사람이 살기 좋은 마을"이란 뜻의 "住村"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지도를 볼 때 주촌이란 지명은 일반적인 의미의 "술(酒)"과는 차원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수백년 전까지 번성했던 선지포구는 당연히 요즘의 유흥가 즉, 주막거리(酒村)가 형성이 되었을 것이고 그래서 주촌지(酒村池)로 불렀을 것이다.(주촌지의 현 위치는 선지들판 한가운데에서 동남쪽에서 200~300M 내려간 지점인데 현재도 노인분들은 이 지점을 '선창거리'라고 부른다)그렇게 볼 때"주촌지(酒村池)" 정면에서 바라보이는 산이기 때문에 주주봉(酒主峰)이 된다.대리(大里), 석칠(石七), 국계(菊溪), 내연(內蓮) 4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대리는 옛날에 부자들이 많이 사는 큰동네였다고 하며 북쪽에 대리골(언각골), 동쪽에 고래새 저수지가 있다. 그 옆 야산에는 가락국시대 고분이 밀집한 원지리(대리)고분군이 있다.석칠은 마을 앞들에 일곱개의 큰 돌(고인돌)이 있다하여 생긴 이름이고 국계는 시냇가에 들국화가 많다하여 생긴 이름이며 이세사효각이 있다. 내연은 안연말, 즉 천곡리 연지(연말)마을 안쪽에 있다고 해서 내연이다. 지금은 무분별하게 들어 선 공장들과 공원묘지 등으로 인해 환경훼손이 심각한 지역이지만 앞으로 도시개발사업이 진행되면서 단기적으론 공장들이 공단으로 이전하고 장기적으로는 공원묘지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면 명실상부한 김해시의 중심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덕암리는 선지리와 원지리 북서쪽에 위치한 덕암(德岩), 용곡(龍谷), 옥천(玉泉) 3개 마을과옥천마을에 속하는 점골을 말하며 최근 덕암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많은 기업체가 들어서 있다.덕암이라는 이름은 임진왜란때 흥해 최씨 형제가 피난와 살면서 후진을 가르쳤다고 하며 뒷산의 바위를 형제바위(덕바위), 동네를 덕암촌으로 부른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용곡마을은 두 청룡봉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서 용곡이다. 절골이라 불리는 마을 뒷산에 덕운사가 있다. 옥천은 마을 뒷산 계곡 이름이 옥계인데, 옥계 맑은 물이 흐른다고 옥수골, 즉 옥천이다.
천곡리는 지리적으로 주촌면의 중간지점에 위치하며 천곡(泉谷), 연지(蓮旨), 용덕(龍德) 3개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 우리 주촌면의 행정 중심 마을이다.(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농협 등 소재)천곡은 뒤산에 샘이 많다고 해서 새미실 즉 천곡이다. 천연기념물 제307호로 지정된 이팝나무와 가락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알려진 천곡산성이 있다. 연지마을은 청동기 시대의 무덤인 대형 고인돌이 남아있는 것으로 봐서 가락국시대 이전부터 생겨난 아주 오래된 마을임을 알 수 있다. 마을 뒷골짜기를 불당골이라고 한다. 용덕은 용산과 덕교마을을 합하여 생겨난 이름인데, 선지쪽에서 보면 산세가 용을 닮았으며, 덕교는 마을앞 길이 조선시대의 국도인 자연도였는데 흥동쪽과 주촌을 연결하는 돌다리의 이름이 덕교(德橋)였다. 덕교가 덕다리 - 떳다리로 변하여 재미있는 전설까지 생겨난 듯 하다. 지금도 덕교 자리엔 돌다리 기둥과 난간들이 물속에 잠겨있다.
양동리는 우리지역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다. 양동(良洞), 신전(新田), 가곡(歌谷)마을로 구성되며, 502전경부대가 위치한 냉정마을도 양동리에 속했는데 몇년전 행정구역개편으로 장유면으로 편입되었다. 양동리에는 양동산성, 양동리 고분군을 비롯한 역사, 문화 유산들이 많으며 특히 양동리 고분출토 유물들은 고대 김해지역에 자리 잡았던 가야사회의 "국가적 성격"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며, 대성동 고분 출토 유물들과 함께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2004년 7월 23일부로 양동리 고분군은 국가사적 제454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앞으로 가야문화권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양동리 고분 정비사업이 완료되면 대성동 고분유적지와 함께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의 고분유적지로 거듭날 것이다. 양동리는원래 사양곡 또는 노래실이라고 하여 가곡리였는데 조선후기 철종 때 양동(어진마을)으로 고쳤다고 한다.
내삼리는 내삼(內三), 원당(院塘) 2개 마을과 원당에 속하는 자현을 말하며, 주촌초등학교가 위치한다. 내삼 마을은 옛날에 삼내(三川)라고 했으며, 내삼과 덕암 그리고 진례면의 경계에 있는 우리지역에서 가장 높은 봉인 황새봉에서부터 지역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주지봉(주주봉)자락까지면적도 가장넓고인구도 가장 많다. 가락국시대에 임금님께 진상하던 쌀을 생산하던 현곡전이 있었으며, 조선조 인조반정의 주역 김자점에 관한 설화가 있는 내삼연못이 학교 앞에 있는데 인조실록에 김자점의 손자 세룡(인조임금의 부마)과 인조의 외딸인 효명옹주(김자점의 손부)의 전장(농장, 별장)이 김해부에 있었는데 주민들에게 민폐를 많이 끼쳐 원성이 자자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내삼마을 안쪽 황새봉 자락 깊은 골엔 아름다운 폭포가 있는데 높이 30m가량의 2단 폭포이며 숲이 울창해 항상 수량이 일정하다. 김해읍지에 능동폭포, 삼계폭포, 내삼(三川)폭포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김해시에서 넘어오는 주촌의 관문으로 선지못을 중심으로 동선(東仙),서선(西仙),내선(內仙) 3개마을로 이루어지며 주동초등학교, 선지사등이 소재한다. 수백년 전까지는 번성한 포구였다고 한다. "주동초등학교"의 "주동"은 주지봉(주주봉)동쪽이라는 뜻이며, 100여년전 구한말의 선지, 원지, 덕암, 천곡 4개리의 행정명칭이 "주동면"이었다. 그래서 "주동초등학교"라고 한다. 선지사 출토 명문기와편에 새겨진 "仙地寺"란 글을 볼 때 선지란 지명은 천년 이상된 아주 오래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현재 계획중인 도시개발사업이 완료되면 과거에 번성했던 선지리는 천년의 시공을 건너 다시 한번 지역의 상업과 물류의 중심지가 될 것이다.
망덕리는 내삼리 원당마을 자현과, 장유면 유하리 후포마을, 농소리와 경계하고 있으며 처음엔 신답리였다가 1914년 신답, 신기를 합하여 망덕리가 되었다. 현재 망덕(望德), 신답(新畓), 신기(新基) 3개 마을로 형성되어 있으며 옛날엔 남해의 바닷물이 조만강을 거슬러 마을 앞까지 올라왔다고 한다. 내삼천에서 흙, 모래 등이 떠 내려와 쌓이고 싸여 새로운 논을 형성하였다 하여 신답이라고하고 들판 한가운데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각단 즉 신기마을이라고 하는데 조선후기 고종임금때 김해 김씨들이 옮겨와 정착하고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넓고 기름진 망덕리 들판에서는 각종 고등소채류와 품질좋은 쌀이 많이 생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