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의 동편에 있는 面(면)이며, 20개리가 있었던 것을 1914년 행정구역폐합으로 6개리가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甘勿也村(감물야촌)으로 나오며, 고려때에는 甘勿也鄕(감물야향)이 있었다. 1981년 9월 대감리 623번지에 면사무소를 신축하였고, 현재 6리 18마을에 면적 70.57km.
법정리 | 마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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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리 | 대감 |
용전 | |
봉암 | |
매리 | 포산 |
소감 | |
신촌 | |
매리 | |
감노리 | 화현 |
신곡 | |
감노 | |
여차리 | 용산 |
백학 | |
여차 | |
우계리 | 우계 |
소락 | |
광재 | |
묵방리 | 묵방 |
장척 |
우리시의 동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면적 70.58km2로서 17개 읍면동중 가장 넓은 면이며, 주민생활권이 우리시와 부산시등 복수지역이고 장척유원지, 낙동강변등 관광자원이 풍부하여 피서철 명소로 많은 피서객이 찾고 있음.
상동면은 김해시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곳으로, 주민생활권이 김해와 부산으로 나눠져 있다. 상동이라는 아름은 김해부의 동편 위쪽에 있는 면이란 뜻으로, 옛 기록에 감물야촌으로 나온다. 고려 때에는 감물야향으로서 나라에 감물을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감물이란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상동면 대감리가 김해지역 철 생산의 중심지였던 점으로 미뤄보면 쇠를 뜻하는 말일 것이다.
최근에는 생림면 나전-상동면 매리 구간 지방도로 공사가 한창인 우계리와 대감리에서 유적이 발굴되었다.
그 중 우계리에서는 가야의 철 생산기술이 신라시대까지 유지되었음을 알려주는 6~7세기 철생산시설과 숯가마가 대규모로 발굴되었다.
상동면에는 여차리, 감로리, 매리, 대감리, 우계리, 묵방리 등 6개 리에 열여덟 마을이 있다. 주요 특산물은 산딸기인데 4대강 살리기 공사로 재배면적이 많이 줄어든 상태다. 대규모 농공단지는 없으며 낙동강변, 장척계곡 등 아름다운 자연관광자원이 풍부하여 피서철 명소로 많은 시민이 찾고 있다.
여름철 무더위도 날리고 자연과 더불어 휴식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면 장척계곡이 제격일 것이다.
부산이나 동김해에서 장척계곡으로 가려면 인제로를 따라 영운리고개를 넘어 안금마을에서 묵방으로 우회전하여 장척로를 따라 가면 된다. 우리가 길을 택한 서김해에서는 삼계동에서 생림 방면으로 향하다가 나밭고개에서 상동IC방면으로 우회전해서 상동로를 따라 약 6킬로미터 정도 가다보면 상동면사무소가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돌아 올라가면 된다. 남쪽으로는 신어산자락과 도봉산이, 북쪽으로는 석룡산과 금동산이 나란히 마주보는 골짜기 도로를 달린다. 면사무소 앞에서 장척로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내동천을 따라 500미터쯤 가서 롯데상동야구장을 지나 장척계곡으로 향했다, 계곡답게 길은 점점 오르막이고 목적지 주변에 다다르자 오른쪽에 식당과 넓은 공터 주차장이 보였다. 왼쪽에는 정자모양의 안내소와 장척계곡 입구로 이용되는 반달모양의 다리가 있었다.
아직 한여름이 아니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때 이른 무더위를 피하고자 찾아온 가족들이 계곡입구에 자리를 깔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신어산의 북쪽 자락과 도봉산 자락 사이에 있는 장척계곡 산책길에는 계곡이 흐르고 있었는데 왼쪽은 사유지인지 음식점이 들어서 있고 계곡을 따라 영업용 평상들이 줄지어 눈에 띄었다. 어수선한 왼쪽과 달리 오른쪽 계곡은 자연 그대로의 바위 위로 깨끗하고 시원한 물줄기가 적당히 흐르고 있어 계곡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자연휴양림이라고 적힌 안내판을 따라 계곡 옆으로 난 숲길을 걸었다. 경사가 낮고 길을 잘 다듬어 놓아서 편안하게 걷기 좋았다. 좀 더 올라가니 길 중간쯤에 넓게 터를 닦은 야영장이 보였다. 천막을 칠 수 있도록 곳곳에 바닥을 다듬어 놓았다. 가로등, 세면장, 간이화장실 등도 마련되어 있었다. 오른편에 있는 정자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다시 숲길을 올랐다. 마음까지 차분해지는 고요한 숲길을 조금 더 걸으니 왼편은 연두색 철책 울타리로 둘러져 문이 잠겨 있는 사유지였다. 바로 앞에는 마을에서 올라오는 포장도로가 가로놓여있었고 휴양림 숲길 250미터는 끝이 났다. 혹시나 하고 포장도로를 따라 위로 올라가보니 길 끝에 생수공장이 자리하고 있었고 공장 옆에는 김해시에서 운양하는 양묘장이 있었다.
숲길이 좀 짧아서 아쉽다는 생각을 하며 온 길을 되짚어 내려가려는데 길가에 빨간 산딸기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입구 주변 계곡에서 주로 놀다 가고 숲길 끝까지는 잘 오지 않는 모양이다. 무르익은 산딸기가 많이 달려 있었다. 청정 산딸기를 한 움큼 따서 맛을 보았다. 마침 문이 잠겨있던 사유지의 주인을 만났다. 흔쾌히 농원 안을 구경시켜 주겠다는 주인의 말에 따라 들어갔다. 잘 가꾸어진 정원, 정자, 손수 지었다는 작은 돌집이 있었다. 마을 사람이 살던 집을 사서 휴식을 위한 장소로 지었다고 한다.
정원에는 어미꿩과 새끼들이 마치 시골 마당의 어미닭과 병아리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 반대쪽에도 건물과 텃밭이 보였다. 계곡 안에 사유지가 더러 있는 모양이었다.
장척계곡은 수량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곡 위쪽에 인공 둑을 쌓아 아쉬웠다. 지금도 또 다른 구역에 공사를 하고 있어서 마을 주민에게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그도 이해가 잘 안된다고 하였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일 때가 가장 아름답다. 둑을 쌓아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똑같은 모습의 계곡이 아니라 자연발생 유원지답게 사람의 손길은 최대한 덜고 장척계곡만의 모습으로 남아있길 바란다.
다음으로 우리들이 향한 곳은 없어진 절터만 남아있는 고려시대 큰 절 감로사지다.
정척계곡에서 내려와 지방도로를 타고 대포천과 나란히 가다 상동IC를 지나서 T자형 도로와 만났다. 가는 길에는 임진왜란 때 구리와 쇠를 캐면서 생긴 동철골 또는 동척골마을이 있었다. 상동로와 동북로가 만나는 삼거리에는 산해정과 예안리 고분군을 알리는 커다란 표지판이 있다. 매리교를 건너 여차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동북로로 가야 감로사터를 만날 수 있다.
아직 낙동강 살리기 공사가 진행 중인 곳도 있었다. 부산시민의 젖줄인 매리취수장을 지나 도로 오른편에 흐르는 낙동강과 강 건너 양산시의 마을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자동차 드라이브에 안성맞춤이다. 낙동강을 끼고 좀 더 가다보면 오른쪽에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새로 조성된 강변공원과 자전거길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주말인데도 이용하는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신곡마을에 다다랐을 무렵 길가에 감로사라는 비석이 있었다. 분명히 감로사는 없어진 절인데 비석이 있는 것을 보니 옛터에 새로 절을 지었는지 의아해서 찾아갔다. 이 마을 입구는 역시 작은 공장이 들어차 공단처럼 되어 있었다. 공장들을 지나 신곡마을 회관 뒤 왼쪽으로 돌아가니 새로 지은 감로사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 우리가 찾던 감로사와는 상관이 없었다.
신곡마을은 감로사가 없어진 뒤 새로 생긴 마을이다. 이곳에는 감로사 터뿐만 아니라 장군차 자생군락지도 있어서 마을을 돌아보았다. 감로사는 이미 사라진 절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장군차 자생 군락지는 안내판이 있을 줄 알았다. 마을을 두 바퀴나 돌아도 안내판이 보이지 않았다. 마을길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아 가게에서 겨우 길을 물어 보았다. 그나마 입구는 집들 사이에 있어 어림짐작으로 찾아야만 했다. 장군차 군락지 입구에서 만난 마을 어르신으로부터 이곳이 감로사가 있던 자리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감로사는 고려 고종 때 해안이 세웠는데 충렬왕 때에는 원감국사 충지가 주지로 있은 큰 절이었다. 「태종실록」에도 국가의 번영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명복을 빌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된 절의 하나로 나와 있다. 예종 때의 「경상도지리지」에도 신어산 감로사로 나와 있으며 고려 때의 안향 등이 읊은 시도 남아 있다.
안민이 이 절에서 자신의 선조인 안향의 시를 퍼내려 준비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군을 이끌고 김해성으로 향하던 중 지금의 불암동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그 때 이절이 다 타고, 남은 영각전을 지금의 동상동 함허정으로 옮겼다고 한다. 영조 때에 세운 감로사 진남루의 돌기둥 스물 네 개가 조선금석총람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조선 후기까지도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감로사는 적어도 13세기부터 약 500년 동안 번성했다. 언제 어떤 까닭으로 없어졌는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이곳의 유물로는 삼층석탑, 연화대좌, 귀부, 부도 등이 남아있었으나 1975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겼다. 감로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제491호 석조여래좌상은 감로사에 있다가 낙동강변 밭에 나뒹굴고 있었다. 1947년부터 양산시 물금읍의 용화사에 모셔놓았다. 용화사는 우리 일행이 지나왔던 매리교에서 옛날에는 그리로 가는 뱃길이 있었던 낙동강 맞은편의 절이다.
감로사가 있던 자리는 사유지로 현재는 공장 등이 들어서 있다. 감로사가 없어진 것은 옛일이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남겨진 유물을 우리 지역에서 제대로 거두지 못하고 다른 지역으로 흩어지도록 관리를 소홀히 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먹을거리가 엄치는 세상이다. 지역은 물론이고 나라의경계도 허물어질 만큼 다양한 먹을거리가 대중화되고 있다. 특히 참살이 바람을 타고 건강식품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바람을 타고 각 지역에서는 고장을 대표하는 특산물을 골라 건강도 지키고 지역 경제도 살리려고 애쓰고 있다. 김해에서는 김해장군차가 주목받고 있다.
우리 일생이 찾아간 감로사터 바로 뒤쪽이 장군차 자생 군락지이다. 전남 보성이나 하동 화개, 제주의 정돈된 녹차밭을 상상했던 우리 기대와는 달리 장군차 군락지는 대나무가 우거진 산비탈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입간판도 금동산으로 접어드는 입구에 있어 길어서는 보이지 않았다.
사유지인 이 산 곳곳에 있는 나무가 장군차 군락지로 확인되면서 2002년에 임도가 생겼다. 그 이전에 심었다는 감나무와 밤나무 등이 차나무 사이사이에 있다. 덩그러니 자리한 정자 옆에는 키가 큰 장군차 묘목들이 무리지어 있다. 묘목의 키가 너무 크고 비탈져서 찻잎을 어떻게 따는지 궁금했다. 길 맞은편에는 울창한 대숲이 있는데 그 속에도 장군차나무가 있다.
김해를 대표하는 살거리인 9품 중 2품인 김해장군차는 서기 48년 가락국 수로왕비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시집올 때 가져온 차 씨앗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하나 역사적인 기록으로 확인된 것은 아직 없다. 고려 충렬왕이 왜구 정벌 때 군사를 격려하기 위해 김해에 왔다가 맛과 향이 좋아 차 중에서 으뜸이라 하여 장군차라 부른데서 차의 이름이 유래한다.
이천년의 향기를 지닌 김해장군차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통차로 「삼국유사」, 「신증 동국여지승람」, 「조선불교통사」, 「김해읍지」에 기록이 있다. 1987년에 군락지를 발굴하여 1999년부터 김해시가 묘목을 지역농가에 보급하기 시작했다. 장군차 시범찻집도 시내를 비롯해 장유, 상동 등에 스무 곳 가까이 있다. 김해장군차 누리집이나 가야뜰 쇼핑몰 등에서도 장군차를 구입할 수있다.
장군차는 잎이 크고 두꺼워 차의 주요 성분인 카테킨을 비롯해 아미노산, 비타민류, 미네랄 등 무기성분 함량이 높다. 장군차는 한때 가야황차로 명성이 높았다. 발효차라는 의미가 아니라 특유의 누런 빛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장군차는 현재 대성동과 동상동 산비탈에 자생 군락지가 있다.
수년간 국내외에서 그 품질을 꾸준하게 인정을 받고 있다. 이와 함께 장군차의 역사성을 보태어 열심히 알린 덕분에 판매율도 높다고 한다. 장군차를 학교급식에도 대고 장군차 스토리텔링파크를 만들어 김해를 대표하는 문화관광상품으로 키우고자 노력하고 있다. 김해시민으로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신곡마을의 장군차 자생 군락지를 지금보다 더 세심하게 돌보는 일도 필요하다.
최근 김해에서 깨끗한 자연환경과 수려한 경관으로 가장 각광받고 있는 전원주택지역은 상동면 여차리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교통이 더욱 불편해서 김해에서 하나뿐인 벽지 초등학교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삼계동에서 생림방면으로 가다가 나전고개에서 상동IC방향으로 우회전하여 나전로로 조금 더 가면 나전교와 상동로로 갈라지는 삼거리를 만난다. 여기서 나전공단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가다보면 도로가 갈라져 감로, 여차라고 쓰인 표지판이 있다. 오른쪽 산길로 오르면 여차로를 따라 여차리로 갈 수 있다.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여덟말고개 또는 여덞막고개는 옛날 어떤 사람이 명당을 얻기 위해 여덟 번이나 이장하면서 초막을 쳤던 데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다 한다. 예나 지금이나 명당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마음은 같은가 보다.
고개를 넘어 남동쪽의 석룡산과 북서쪽의 무척산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내리막길을 계속 달리다 보면 눈길이 트이면서 무척산 아래에 아름다운 전원주택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여기가 바로 백학마을이다. 백운동과 학운동이 합쳐져 생긴 백학마을은 20년전에 시작된 전원주택지 조성사업으로 현재 많은 전원주택이 들어서 있어서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백학교를 가로지르는 여차천 앞에 백운암 안내판이 큼직하게 서있다. 백운암까지 2.9킬로미터를 알리는 이정표도 서 있다. 백운암이 있는 무척산 동쪽은 숲이 울창하고 바위가 비교적 적어서 기암괴석이 즐비한 서쪽과는 색다른 맛이 있다. 산길 아래는 완만하고 길옆으로 산딸기와 감나무밭이 있어 마치 오솔길을 달리는 기분이 들었다. 오를수록 산길이 비탈지고 휘어지며 숲도 울창했다.
2킬로미터 정도 오르니 왼쪽에 주차장으로 쓰이는 공터가 있어서 차를 세우고 걸어갈까 했다. 주차된 차가 없고 차량진입금지라는 안내문도 보이지 않아서 우리는 계속 차로 오르기로 했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주차장에서 백운암까지 가는0.9킬로미터의 길은 어찌나 많이 기울고 휘어졌는지 놀이기구로 치면 최고난이도의 T익스프레스를 탄 기분이 들었다. 차가 미끄러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운전대와 몸을 최대한 붙여서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산길을 기다시피 오르다 내려가는 등산객들을 만났다.
등산객들은 우리 일행의 사색이 된 표정을 보더니 조금만 더 가면 된다는 위로와 함께 차를 타고 오다니 용감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길이 이렇게 험한 줄 알았으면 절대 차를 타고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비탈져서 차도 덜덜거리고 두려움에 다리를 덜덜거리며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을 올랐다. 드디어 무척산 백운암이라고 적힌 일주문이 눈앞에 들어왔다. 일주문을 보자 눈물이 날 뻔했다. 오는 길이 너무 힘들었던 만큼 기암절벽 아래 세워진 백운암을 올려다보니 주변 풍경이 정말 아름다웠다.
일주문을 지나서 가파른 계단을 오른 후 샘물을 한 바가지 들이켰다. 다시 오른쪽으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니 극락전 앞에 다다른다. 힘든 길을 오느라 수고했다며 차를 권하는 아낙네의 미소가 그렇게 친절할 수 없었다.
백운암은 무척산의 서쪽에 있는 모은암과 쌍벽을 이루는 암자로 허왕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이 세웠다거나 무척대사가 지었다는 전설이 있다. 고려시대 감로사에 속한 암자로 추정된다. 현재의 건물은 한눈에 봐도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절의 내력을 알아볼 수 있는 특별한 유물이 없어서 안타까웠다. 절 안에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종모양의 부도가 남아 있었다. 세월의 흔적에 글자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극락전 앞에서 바라보는 낙동강과 주변 풍경은 참 뛰어났다. 내려다보이는 낙동강가 용산마을의 이름처럼 용 모양의 지형이 낙동강을 향해 뻗어있는 모습이 멋졌다.
힘든 길이었지만 오랜 전설과 주변 지역의 모습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아름다운 절경을 품은 백운암을 떠나려니 길이 너무 험해 다시 못 올 것 같은 생각에 아쉬움이 더했다. 예상대로 내려오는 길은 올라갈 때보다 더 힘들고 두려웠다. 처음 찾는 이가 자동차로 올라간다면 주차장에서부터는 차라리 걸어가기를 권한다.
고려때 甘勿也鄕(감물야향)이었고 조선초기까지도 甘勿也村(감물야촌)이라고 하였다. 감물 마을의 뜻일 것이다. 1914년 용전과 봉발리를 병합하였다.
대감-도로가에 있는 본마을이며,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등이 있다. 서쪽에 있는 대감교는 1923년 가설되었으며, 길이 30미터이다. 1943년 대감저수지가 시설되었으며, 윗쪽에는 풍수지리설에 의한 거미가 나올 자리라고 한다. 농협, 금동초등학교 등도 있다.
社倉(사창)-조선시대에 고을의 환곡을 저장하는 사창이 있었다.
沙器店(사기점)골-대감 남쪽의 신기슭에 있는 골짜기인데, 여기에서 사기그릇을 구웠다고 전한다.(도요지 참조)
대감리 陶窯址(도요지)-예종때 경상도지리지에 府東(부동) 甘勿也(감물야)에 磁器所(자기소)가 있는데, 품질은 하라고 적혀있다. 이 요지는 가마는 파괴되고 도자기편만이 산재하고 있다. 제1요는 조선초기로 추정되며 印花粉靑(인화분청)과 白土粉靑(백토분청)과 백토분청의 본(본), 甁(병)등이 출토되며, 유약의 빛깔이 불투명하고 내부의 문양도 선명하지 못하다. 제2,3,4요는 조선후에 속하며, 회백자로서 본, 접시등이 출토되며 기벽이 두텁고 목은 4-5개이다.
內洞谷(내동곡)-안골이라고 하며, 대감의 남쪽에 있는 골짜기 안의 마을이다.
분통골-대감의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개정자 들-용전과 대감사이에 있는 들인데, 돌감나무가 있었다.
흰너설-대감의 남쪽에 있는 너덜
마당재-대감에서 우계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壬辰山谷(임진산곡)-대감의 남쪽에 있는 뒷산이 남동쪽으로 뻗친 산골짜기이다. 임진왜란때 주민들이 피난했다고 한다.
탁蜂齊(탁봉재)-贈吏曺判書(증이조판서) 盧漢石(노한석)의 墓下(묘하)에 있다.
百英齊(백영재)-감양덕이 세웠다.
龍田-(용뫼)등의 아래쪽에 있기 때문에 용전이라고 한다. 북쪽에 1944년에 판 용전저수지가 있다.
용전당산-용전의 북쪽에 있는 대여섯 아름이나 되는 포구나무로서 동제를 지내고 있다.
용뫼등 소=용전의 옆산에 있는 늪, 둘레는 약 1km이며, 옛날 큰 용이 살았다고 전한다.
琴洞谷(금동곡)-용전의 북쪽 금동산(463센티미터)밑에 있는 골짜기이다.
손골-용전 남쪽에 있는 골짜기
쇠낌 들-용전의 동쪽에 있는 마을인데 쇳물이 끼어 있다고 한다.
쇠스랑 점-용전 북쪽의 산에 있다. 그 남서쪽의 골짜기는 큰 불골인데, 옛날 큰 화재가 있었다.
청룡산-용전의 동쪽에 있는 산
굴바위 골-용전 북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옛날 이곳에서 쇠를 캐냈다고 한다.
벼락바위-용전의 서쪽에 있는 바위
劉亭子(유정자)-임진왜란때 유씨가 이곳에서 피난했다고 하는데, 용전에 있는 들을 말한다.
옛 지명이 봉발리로 불리오던 중, 한말 지역개명 구역분활로 인하여 봉암으로 자연마을이 형성 되었다.
옛 봉발리는 고려때부터 맨 처음 나씨(羅氏)의 성을 가진 분이 촌락을 이루기 시작하였으며 봉발리는 벌들이 운봉준비를 하며 벌꿀을 치기 위하여 벌통에 들어오는 형(봉왕비화설)이며 자손이 왕성하는 곳 또 역남리 8명지(팔명지)인 옥녀탄금형이 있어 옥려가 탄금을 써고 거문고를 타는 설 그 하부에는 음경(부녀자의 음부)기 있으며 그 앞 들에는 1일 1만말이 다니는 대로가 생기설이요, 그 동쪽 맡은편은 연화 꽃이 향상 피어 있다는 연화봉이 있어 그 꽃으로 인하여 꽃고개가 생기고 그 꽃 개고의 산응선 전체가 나비가 날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또 가야국 시절에 소록사란 사찰이 있었는데 그 절 산 하부에는(기슭) 조개 껍질이 형성되었고 옛날에 그 시절에는 낙동강에서 배로써 왕래하였다는 설 현재도 그 사찰 위치한 주위에는 깨어진 기왓장이나 흙이 검질게 흔적이 남아 있으며 옥녀가 연화의 꽃을 보면서 미소를 짓고 있어 그 옛날에는 온화한 마을 풍경이었다.
浦山(포산)-陽達(양달)의 서쪽 길목에 있는 마을이다. 119家口, 344名
새들안-하매리의 서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한말에 申兵史가 황무지를 개간하고 둑을 쌓았다고 한다. 새들안에서 윗매리로 넘어가는 새들안고개가 있다.
銅鐵谷(동철곡)-매리의 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임진왜란때 구리와 쇠를 도굴하면서 마을이 생겼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도 청의 광산이 있었다.
銅(동)척 鐵鏞山(철용산)터-琴桐山(금동산) 동쪽으로 뻗은 고바우라고 하는 산의 동북자락으로 철분이 많이 함유된 철광석이 많이 눈에 띈다. 산자락의 말단부 구름에 宅地造成(택지조성)을 위해 조금 깍아 낸 부분이 있는데, 상층 1.5미터 정도의 하부에서 지름 3-4미터 미만의 철광원석이 거의 수평으로 깔려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시기를 알수 없는 유물이 동반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대의 철생산 유적으로 파악된다. 이곳에서 채집된 유물은 철재와 와 원석, 그리고 가야토기 고려토기편들이다.
이를 미루어 보아 가야시대에서 최근까지 철생산지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발굴조사를 실시한다면 고대의 제철구조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
30년전까지도 철광석을 채취했다고 하며, 물금광산과도 거리가 멀지 않기 때문에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같은 광맥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뒷산에 등불을 걸어 놓은 모양의 명당이 있어, 世代(세대)로 文科(문과) 12榜(방)을 할 자리라고 하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洞燭(동촉)이라고 부르며 새들 안으로 넘어가는 동촉고개라고 한다.
牟山(모산)-銅鐵谷(동철곡)의 南쪽에 있는 마을이며, 蜂發(봉발)로 넘아가는 고개가 牟山里(모산리) 고개이다. 이 고개 아래에 외나무 다리가 있었고 서쪽에 찬물샘이 있다.
宕巾(탕건)바위-牟山(모산)의 東쪽에 있는 바위인데 宕巾(탕건)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그 밑에는 두꺼비바위가 있고, 윗쪽에는 부엉이 바위가 있다.
북바위(鼓岩:고암)-두꺼비바위의 동쪽에 있는데 두드리면 둥둥하는 북소리가 난다고 한다.
陽達(양달)-浦山(포산)의 東쪽에 있는 陽地(양지)쪽의 마을이다. 陽達(양달)앞에 低濕地(저습지) 5,600坪 을 開墾(개간)하고 68,000坪의 農地(농지)를 造成(조성)하는 공사를 1983년 着工하여 제방 660미터를 쌓고 1984년 완공하였다.
浦項(포항)-개목이며, 포산의 입구에 상동면 각지의 갯물이 이곳에서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예부터 浦項津(포향진:개목나무)가 있어 梁山郡(양산군) 舊勿禁(구물금)으로 건너갔다. 하매리와의 사이에 있는 강을 소래강아라 하고, 포항나루터에 숫미륵이라고 彌勒佛(미륵불)이 있다,
小甘-양달의 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안쪽에는 안골이 있고 1944년 저수지를 팠다.
풍수지리설로 이 마을 뒷산에 나는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양으로 명당이 있어 3대후에 2현인과 장수가 나올 자리라고 한다. 99가구,305명.
仙無洞(선무동)-소감의 남쪽에 있는 마을인데 선무동골짜기에 선무사가 있고, 선무동 고개는 대동면 덕산리로 넘어간다.
신촌마을은 1963년 1월 1일 창립으로 마을이 탄생하면서 신촌마을이라는 호칭이 사용되었다. 신촌은 절경이 빼어나 앞산은 배나무골, 뒷산은 챙이골, 선녀봉에서 내려오는 하천이 유유히 흐르며 낙동강을 굽어볼 수 있는 정말 산수가 오묘한 절경을 이루고 있다. 오랜세월 발전을 거듭하여 마을 양쪽 중턱에는 주택 및 공장이 조화를 이루며 밀집해있으며 2001년 현재 공장수는 165개업체가 입주하여 산업발전에 기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업체들의 단합과 주민들의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업체들은 청우클럽을 운영하며 마을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마을의 유동인구가 1일 약 2천여명에 이르는 현시점에 마을과 업체의 안전을 보호코져 무인경비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으며 야간은 자율방범을 실시하고 있으며 마을 자체순찰차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신촌마을의 숙원사업인 소감마을 입구부터 우회도로 800m를 2차선으로 확정하여 준공식을 1998년 2월 4일 갖은바 있으며 다시 2001년 1월 10일 440m 2차선확장공사를 마친상태이며 머지않아 2차선 확장공사를 계속 연정하여 교통량해소에 크게 기여할 것이 기대된다.
뒷산에 매화꽃이 땅에 떨어지는 모양의 明堂이 있기 때문에 매리라고 한다.
1914년 상매리, 하매리, 陽達(양달), 小甘(소감)을 병합하여 매리가 되었다. 1983년 4월 沼地(소지)
68,000평을 개간하기 시작하고, 1991년3월 매리취수장 주변 571킬로미터를 淸淨地域(청정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상매리-위 매리이며, 북쪽의 마을이다. 이곳에 梅花落地形(매화낙지형)의 명당이 있어 9대후에 百子千孫(백자천손)이 나고 富貴(부귀)룰 승溥할 자리라고 한다. 북쪽에 고바위라는 큰바위가 있다.
하매리-아래 매리인데 1969년 매리교가 놓여져 개목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북쪽에 정자바위가 있다.
화현-꽃고개이며, 成仁(성인)이라고도 한다. 대감리로 남어가는 고개이며, 이 마을의 동쪽에 고바위가 있다.
新谷(신곡)-甘露寺(감노사)가 廢寺(폐사)가 된 뒤 새로 생긴 마을이다. 탑이 있었기 때문에 塔谷(탑곡)이라고도 한다. 50家口, 150名.
甘露里地石墓(감노리지석묘)-신곡마을 중앙에 있는 논가에 二基(2기)가 있고, 밭둑이는 上石으로 보이는 大石이 비스듬히 눕혀져 있다. 과거에 밭에 둑을 만들려고 밀어내어 버렸다고 한다. 주변에서 관련되는 遺物(유물)은 채집되지 않았으며 原岩般(원암반)에서 떼어낸 자국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地石墓(지석묘)로 推定(추정)된다.
감로寺地-고려때 高宗 24年(1237) 해안이 創建(창건)하였다. 忠烈王(충열왕)때에 園監國師(원감국사) 仲止(중지)가 住持(주지)로 있는 큰 寺刹(사찰)이었다. 世宗實錄(세종실록)(7年12月)에 金國의 資福寺察(자복사찰)의 하나로 華嚴宗(화엄종)에 屬(속)한다고 나와 있다. 譽宗(예종)때의 慶尙道地理志(경상지리지)에도 神魚山甘露寺(신어산감노사)로서 禪宗(선종)에 屬(속)한다고 하였다. 高麗(고려)때의 安裕(안유)(상), 朴仁享(박인향), 李堅幹(이견간)등이 읆은 題詩(제시)가 남아 있다.
壬辰倭亂直前(임진왜란직전)에 安愍(안민)이 이 절에서 先祖(전조)인 安珦(안향)의 詩板(시판)을 刊行準備(간행준비)하다가 亂(난)이 알어나자 僧軍(승군)을 이끌고 金海成(김해성)으로 향하던 중 立石江(입석강:지금의 부원동)에서 戰士(전사)했다고 한다. 그때 이 절이 全燒(전소)하고 남은 靈覺展(영각전)이 涵虛亭(함허정) (동상동)으로 移建(이건)되었다고 하며, 英祖(영조) 7年(1731)에 세운 감노사 鎭南樓(진남루)의 24석주가 朝鮮金石總覽(조선금석총람)에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후기까지에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邑誌(읍지)에는 감로사의 암자로 南(남), 中(중), 西, 00, 白蓮(백련), 石永庵(석영암)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다고 나와 있다.
감로사의 뒷산에는 풍수지리설로 玉燭(옥촉)이 하늘에 비치는 모양(玉燭照天形:옥촉조천형)의 명당이 있어, 文科(문과) 12명에 宰相(재상)이 나올 자리라고 한다.
감로사지 石造如來坐像(석조여래좌상:보물 491호 68.12.19지정) 구한말에 낙동강변으로 옮겨졌다. 1947년 양산군 물금의 龍華寺(용화사)의 법당을 重修(중수)할 때 主尊(주존)으로 奉安(봉안)하였다. 높이 125센티미터 화강석으로 통일신라말기로 추정된다.
감로사 石塔(석탑)-,신곡에 남아 있던 석탑등은 1975년 11월 동아대학교박물관으로 옮겨졌는데 龜跌(구질)(200×140센티미터), 탑의 剭蓋石(옥개석) 基檀部分(기단부분:지름120센티미터), 蓮花臺石(연화대석:53센티미터), 浮屠(부도:높이 300센티미터)와 臺座破片(대좌파편)등이 소장되고 있다. 이 석탑옆 臥牛寺(와우사)라는 절터가 있다.
新谷當山(신곡당산)-신곡의 북쪽에 있는 당산나무로서 한아름되는 포구나무인데, 전에는 당산제를 지냈다.
白蓮庵地(백련암지:감로리산 335의1)-감로사의 末庵(말암)의 하나이며, 옛날부터 백련암터라고 불렀다. 球形(구형)의 부도가 있고, 지금 백운암에서 관리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튼 사찰인 감로사가 있었으며, 1914년 신곡, 화현을 병합하였다.
감로-신곡의 북쪽에 있는 본마을이다. 감로진은 양산군 원동면 원동리로 건너가는 낙동가의 나루터이다. 56가구, 193명.
감로는 선창, 감나무골, 안골 3개마을이며 사진에 보이는 선창마을의 큰소나무는 당산나무이며 수령이 약 600년이며 옛날 배를 묶은 표시가 있고 경부선 철도와 낙동강과 더불어 고향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沙器幕(사기막)고개-甘露(감노)에서 新谷(신곡)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옛날 甘露寺(감로사)가 繁盛(번성)하였을 때에는 많은 스님들이 이 고개를 넘어다녔다. 沙器(사기)를 만드는 幕場(막장)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龍山(용산)-용이 내려오는 형국의 산세 때문에 생긴 이름이며, 龍珹川의 하류에 있다. 옛날 龍塘里(용당리)라 불렀다. 1983년 부산광역시의 대단위 취수장이 기공되었다가 기능상실로 1988년 6월 철거되었다. 75가구, 214명
龍塘津(용당진)-余次里(여차리)의 최북단에 있는 나루터이다. 낙동강가에 독뫼(46마터)가 내려오고 있다. 梁山郡(양산군) 院洞面(원동면) 용당리로 건너가는 나루터며, 조선시대말기까지 祈雨端(기우단)이 있었다.
용성천-甑峰(증봉)과 石龍山(석용산)에서 발원하여 여러 마을 흘러서 後浦川(후포천)을 합하고 용산앞에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다시곡-다곡, 다시곡에서 오곡으로도 쓴다. 옛날에 다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용산초등학교(1938년 5월 여차간이학교로 설립)가 있다.
募石亭(모석정)-경주 김씨문중의 薺室(제실)인데 金炳甲(김병갑)이 세웠다.
後浦(후포)-뒷개이며, 후포천 뒤에 있고 용산의 서쪽이 된다.
白鶴(백학)-白雲洞(백운동)과 鶴雲洞(학운동)이 있는 마을이며 44가구, 135명.
白雲洞(백운동)-학우동의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無隻山(무척산) 상봉아래에 백운암이 있기 때문이다.
절터골-백운동의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며, 백운암이 있다. 가락국시대 장유화상이 창건한 사찰이라고 한다.
학운동-서용성의 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백운, 학운의 두마을사이에는 백운저수지가 있다.(1944년 시설)
抱高亭(포고정)-학운동의 동쪽에 있는 마을인데, 한아름되는 포구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餘次里(여차리)이며, 옛날 나룻배가 닿는 곳이었다. 睿宗(예종)때에 慶尙道地理(경상도지리)에 余次里(여차리)라고 나오며, 陶器所(도기소)가 있었는데 品質(품질)은 下(하)라고 나와 있다. 1914년 龍塘(용당), 後浦(후포), 龍城(용성), 鶴雲(학운)을 倂合(병합)하였다.
余次(여차)-余次里(여차리)의 본마을이며, 두서너 아름되는 감나무 고목이 있다.(감나무停),
32가구, 120명
龍城(용성)-용재라고 하며, 東,西龍成(동,서용성)으로 나눈다.
東龍成(동용성)-西龍成(서용성)의 동쪽 도로가에 있다. 저수지가 있다.
九谷嶺(구곡령)-아홉살 고개 또는 수청고개라고 한다. 龍城(용성)에서 右溪(우계)로 넘어 간다. 아흔아홉굽이가 된다고 한다. 石龍山(석용산)(521미터)의 동족이다.
西龍成(서용성)-東龍成(동용성)의 서쪽, 龍成川(용성천)의 건너편에 있다. 저수지가 있다.
德修齊(덕수제)-동,西龍成사이에 유봉 宋翼洙(송익수)가 세워 溜蓬齊(유봉제)라고 하였다.
甑峰(증봉)(233미터)-行舟峰(행주봉)이라고도 하며, 生林面과의 경계가 된다.
여덜막 고개-西龍成(서용성)에서 生林面(생림면) 上沙村(상사촌)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옛날 어떤 사람이 이곳에 移葬(이장)하려고 明堂(명당)을 여덟 번이나 찾은 끝에 끝내 찾았다.고 한다.
所樂(소락)-우계리의 도로남쪽에 있어, 윗소락 아래소락으로 나누며 상,하소락교가 있다. 동쪽에 있는 나는 새가 숲에 사는 모양(비조누임형)의 명당은 백자 천손이 나올 자리라고 하고, 북쪽에 있는 시내에 반월이 잠기는 모양(침계반월형)의 명당은 자손이 많이 날 자리라고 한다. 수령 250여녀의 팽나무는 면나무로 지정되어 있다. 105가구. 325명.
上所樂(상소락)-윗소락이며, 도로변에 있다.
中山(중산)-산소락의 남쪽에 있으며, 산의 모양이 중처럼 생겼기 때문에 중산이라고 한다.
中山齊(중산제)-중산에 있으며, 죽암 허경철의 묘하에 있어 애춘제라고도 한다.
1995년 중수하였다.
下所樂(하소락)-아래 소락저수지가 있다.
未里嶝(만리등)-소락교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며, 아래소락의 북쪽이다.
대포천의 상류 시냇가에 있는 마을이며, 1914년 所樂(소락), 未里嶝(만리등), 光在(광재)를 병합하였다.
우계-소락의 북쪽에 있는 본마을인데 조선시대후기까지 守禦倉(수어창), 紙所(지소)등이 여기에 있었다. 남쪽에는 1944년에 판 저수지가 있고, 큰 돌은 큰 봇댕이라고 한다. 1983년 종합연수농장이 들어서고, 1984년에 임도 1킬로미터를 개설하였다. 73가구, 207명.
堂山祭(당산제)-북쪽의 산기슭에는 당산할배당이 있고, 할매당은 남쪽 산기슭에 있다. 매년 정월 14일과 10월 14일 자정에 당제를 지낸다. 2001년 할매당을 할배당으로 합하였다.
둥구나무-수령560년의 느티나무가 있는데, 높이 13미터, 둘레 5.1미터, 면적 100세제곱미터의 거수로서 도나무로 지정되어 있다. 둥구나무 샘이 있다.
우계리 고적군-상동농원의 서남쪽 야산에 있는 가야시대(4-5세기)고적들인데, 대부분서관묘이고, 지석묘도 있으나 많이 도굴되었다. 세형동검껍질(동의사)토기등이 출토하였다.
魚代谷(어대곡)-우계의 아래쪽에 있는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고기가 화한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양의 명당이 있어 누대로 부귀할자리라고 한다.
紙所谷(지소곡)-우계의 북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종이를 만드는 지소가 있었다. 해방후까지도 상동제지(닥지)로 알려졌다.
九谷嶺(구곡령)-아홉살 고개라고 하는데, 우계에서 용성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우측능선에 장군임이 있는데, 옛날 김해 고을에서 이름난 네 장군이 해마다 이곳에 소풍을 나와서 이 바위로 힘을 겨루었다고 전한다.
光在-풍수지리설에 의한 황금 소반모양(금반형)의 명당이 있어, 거부가 나올 자리라고 하기 때문에 금빛이 있는 마을의 뜻으로 광재라고 한 것이다. 광재곡이라 부르며, 광재사도 있었다. 동남쪽에 있는 들은 광재들이고, 1944년 저수지를 팠다. 62가구, 193명.
石龍山(석용산:512미터)-광재의 동북쪽에 있으며, 석류봉이라고도 한다. 옛날 석용이라는 효자가 이곳에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고 전한다.
光在峴(광재현)-공재에서 생림면 사촌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馬堂峴(마당현)-광재에서 생림면 나전리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이곳에 마당을 닦고 추수를 했다고 한다.
당산제-정미소위에 당사가 있어 당산을 모시고 매년 정월 14일 당제를 거행한다.
金孝子門-외부리 김좌수라고 속칭되는 효자 김벽수는 3년간 시묘를 했다고 하는데 광재마을 뒤에 있다.
행장만이 남아있다.
吳壽奉(오수봉) 효자비-처 경주이씨도 효부이며, 3년간 시묘하는데 범이 와 함께 지켜 주었고 돌아갈 때는 새가 따라왔다고 한다. 고을과 감영에서 누차 상을 내렸다. 1928년 광재고개 아래의 길가에 세웠다가 1954년 당걸산에 이건하였다.
長遊宗禪院-가락불교 장유종을 창시하고 장유화사의 영정각과 대웅보전등 4동을 1995년 10월 준공하여 봉불 개안식을 여었다.
신어산의 뒤쪽에 있고, 마을이 어두우며, 또 풍수지리설에도 등불을 달아놓은 모양(가등형)의 명당이 이곳에 있어 자손을 보전할 자리라고하여, 어두운 곳이므로 등불을 달았다는 뜻이다. 1914년 장척리를 병합하였다.
묵방-상동면의 가장 서남쪽에 있으며, 서로 생림면과 남으로 삼안동과 접경한다. 윗묵방과 아래묵방으로 나눈다. 33가구, 107명.
상묵방-윗묵방이며, 1944년에 판묵방저수지가 있다. 서남쪽에는 신선바위가 있다.
도둑고개-상묵방에서 김해시 삼방동영운으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옛날에 도둑이 많이 출물했다고 한다.
하묵방-아래묵방이며, 상묵방의 서북쪽에 있다.
낙지봉(소어봉)-하묵방의 서북쪽에 있는데 산의 모습이 낙지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증이조판서 이 묘-전주인으로 직제학을 지냈다. 인조 11년(1633)이곳에 안장했으며, 비문은(낙주제 이선생 신도비)라고 새겼다.
묵방제-낙주제 이 의 묘하에 있다.
長尺(장척)-옛날의 장척리이며, 탁봉산의 남쪽에 있다. 서남쪽에는 1944년에 판 장척저수지가 있다. 동쪽에는 풍수지리설로 산돼지가 시내로 내려오는 모양(산저하계형)의 명당이 있어, 자손많고 투향할 자리라고 한다. 49가구, 136명.
묵은 터-장척의 북쪽에 있는데 옛날에는 인가가 많은 마을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묵은 터가 되어버렸다.
절터골-장척의 동남쪽에 있는 절터가 있는 골짜기이며, 남쪽에 탕건바위가 있다.
생명고개-절터골에서 대동면 주중리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주부동고개라고도 한다. 옛날 산적이 출몰해서 행인의 생명이 위태로왔다고 하며, 이 고개를 넘어가면 동쪽에 대문처럼 생긴 대문바위가 있다.
琸峰山(탁봉산)-장척의 동북쪽에 있으며 돛대산이라고도 부른다.
神漁山(신어산:630미터)-장척의 남쪽에 있으며, 김해시 삼방동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영구암이 있으므로 이 산을 구암산이라고도 부른다.
梨木嶝(이목등:배나무 등)-장척의 서북쪽에 있는 등성이며, 큰 돌배나무한 포기가 있다.
長尺熔鐵地(장척용철지)-장곡사옆의 대밭굼텅이에 김태선씨 집안에 쇠를 녹인 터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