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는 오랜 역사의 향기가 깃들어 있는 고장이다.
오래전 가락국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의 처남 허보욱이 허황후를 따라 이 나라에 와서 이곳 장유에 절을 세우고 오랫동안 머물러 돌아가지 않다가 입적(장유불반 : 長遊不返)하여 후세에 장유화상(長遊和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장유산(지금의 태정산) 부근에 마을이 형성되자 ‘장유촌(長遊村)‘이라는 지명이 생겼고 이곳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장유사(長遊寺)‘라 하였다. ’유하촌(柳下村)‘은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유지앵소(柳技鶯巢 : 버드나무 가지에 있는 꾀꼬리 집)의 명당자리가 있다하여 불렀다고 전하는 반면에, 지명을 연구하는 학자는 김해부의 서쪽에 있는 들 부근에 형성된 마을에서 ’유등야(柳等也)‘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주장한다. 지금의 삼문리 능동 마을은 가락국시대 임금의 능(陵)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며 젤미마을 아파트 지역 일부는 신라말기부터 향, 소, 부곡이라는 특수 부락의 하나인 ’제을미(齊乙彌, 젤미) 鄕‘이라고 불렀던 곳이다.
고려시대에는 ‘제을미향’, ‘장유촌’, ‘유하촌’의 세 마을로 형성되었고, 조선시대 광해군 8년부터 효종 7년까지 41년 동안(1616~1656)에는 지금의 신문리 용산(옛날 이름은 진골 : 鎭谷) 마을에 ‘신문진(新門鎭)’이 설치되어 경상도의 국방요지가 되었다. 조선중기 여지도서(與地圖書 : 1757~1765)의 김해진김해도호부(金海鎭金海都護府)에서는 ‘유등야면(柳等也面)’이, 호구총수(戶口總數 : 1789)에서는 유등야면에 말단 행정구역으로 18개 리(里)가 속한다고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한다.
그 후 1810년(순조 10년)에 ‘유하면(柳下面)’으로 고쳤다가 1879년(고종 16년)에 다시 ‘유등야면(柳等也面)’으로 고치고 1885년(고종 22년)에 ‘장유면(長有面)’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888년(고종 25년)에는 장유면(長有面) 8개 리(부곡, 유하, 내덕, 무계, 대청, 삼문, 신문, 관동)와 수남면(水南面) 4개 리(율하, 장유, 응달, 수가)로 분리되었다가 다시 1914년에 수남면이 장유면에 합병되었다. 그 후에 부산경남공동경마장을 조성하면서 2000년 1월 12일 수가리 ‘가동’ 마을이 부산시 강서구 범방동에 편입되고, 부산시 강서구 범방동 ‘장전’ 마을은 장유면에 편입되었다.
중봉사(中峰寺)의 산문(山門)이 있었다 하여 ‘사문리(沙文里)’라 불렀고, 또 ‘삼은(三隱, 三恩)리’, ‘사문(斯文)리’의 다른 지명도 있었다. 1914년 능동과 월산동을 병합(倂合) 하였다. 2000년 택지개발로 대부분이 신도시 지역으로 편입되어 지금은 월산 마을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능동과 삼문 마을 일부가 남아 있다.
[유적지, 기념물] 陵洞古墳群, 陵洞石人 床石, 陵洞山城, 中峰寺터
※ 참고자료 : 증보 김해지리지(이병태 저. 1996년 김해문화원 발행), 김해의 지명(민긍기 저. 2005년 김해문화원 발행), 김해의 지명전설(이홍숙 저. 2008년 김해문화원 발행)
불모산(佛母山), 용지봉(龍池峯)과 추월산(秋月山) 아래에 있고 여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맑기 때문에 대청리, 대청천이라고 한다. 1914년 계동과 상점을 병합 하였다. 장유사로 올라가는 계곡과 장유폭포가 유명하다. 지명을 연구하는 학자 민긍기는 ‘김해의 지명’에서 ‘주위의 중심이 되는 큰 마을’, 이홍숙은 ‘김해의 지명전설’에서 ‘중심산 자락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우리말 뜻에서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유적지, 기념물] 장유화상 사리탑(지방문화유산자료 제31호)
※ 참고자료 : 증보 김해지리지(이병태 저. 1996년 김해문화원 발행), 김해의 지명(민긍기 저. 2005년 김해문화원 발행), 김해의 지명전설(이홍숙 저. 2008년 김해문화원 발행)